▲ 김 석 천(전 교사)

 잊어버리려고 했다. 묵은해를 보내면서 좋지 않은 일들일랑 멀리 떠나보내려 했다. 
한데 지면과 방송을 통해 드러나는 부끄러운 역사는 기억을 일으켜 세운다. 
촛불 혁명으로 정권이 바뀌고 세월이 흘렀다.
국민을 실망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P씨의 초췌한 얼굴이 스크린에 비칠 때마다 실망은 부활하고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글귀가 마음을 스쳐 간다. 
가슴 한켠에선 애잔함과 동정심이 스멀거리기도 한다. 하나 국정 농단 주역들의 뒷모습을 볼 때 동정심은 사그리(모두) 사라지고 만다.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다워야 하지만 뒷모습도 아름다워야 한다. 
한때 국가를 대표했던 분이 수용실(收容室)에서조차 갖은 술수를 부리는 모습은 실망 그 이상이다. 
다산 정약용은 말했다. 인생사가 속고 속이며 살아가는 것이지만 참으로 속아 넘어가는 백성은 없다고 말이다.

 정치권력의 공공성을 훼손했으며 사적 인연을 통해 국정을 농단하고, 사익을 챙기고 지키기 위해 국가기관을 동원하고…, 부끄러워 거론하고 싶지 않은 수많은 비리들, 대체 어떤 민주국가의 공직자가 이보다 더 역사를 퇴행시키고 국익과 국격을 해쳤을까? 하나 더욱 실망스러운 모습은 틈만 나면 적폐청산을 논했던 이들이 정작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는 반성은커녕 잘못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세상을 그리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내 삶의 경험으론) 세월이 흐른 후엔 역사는 진실을 말하는 법이다. 
어렸을 적, 아버지께서는 고(故) 박정희 대통령을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저 양반 생긴 것 좀 봐라. 야무지게 생겼지? 저랑께 정치를 잘 하제.” 
하나 세월이 흐른 후에 깨달은 것은 아버지의 생각은 무지(無知)한 세대 속에 사셨던 아버지의 무지였다. 아버지가 좋아하셨던 그는 영구 집권을 꿈꿨던 독재자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으니 말이다. 
진실은 인양되고 만다. 굳이 사가(史家)의 필(筆)을 빌리지 않더라도, 세월이 흐르면서 국민의 마음에서 역사로 정리되고 후손들에게 전수된다. 

 지면(紙面)이 썩은 냄새로 가득하다. 어제의 부패가 똬리를 틀고 있다. 
MB라는 분도 자유롭지 못하단다. 그래서인지 기자회견 모습이 사냥꾼에 쫓기는 토끼의 몸부림 같다. 표리가 부동한 이들이 대를 이어가며 이익집단처럼 행동하고 적폐 청산을 논했다니 얼굴이 뜨겁다. 
작년에 교수신문들이 뽑은 사자성어가 파사현정(破邪顯正)이란다. 그릇된 것을 깨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는 의미다. 
MB 임기 마지막 해였던 2012년도에도 파사현정(破邪顯正)이 사자성어에 선정된 바 있다고 하니 역사가 멈추어 있는 듯하다. 
지난 일 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하나 그릇된 것을 깨뜨리는 파사(破邪)도, 바른 것을 드러내는 현정(顯正)도 지지부진하다. 기득권 세력의 저항도 만만찮다.
부끄러운 과거는 국민의 고통이기에 반드시 청산되어야 한다. 고름은 짜내야지 그대로 두어서는 절대로 살이 되지 않는 법이다.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 그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은 짓이다.’ 알베르 카뮈의 말이다. 
일부 보수 언론과 수구 정치권 등 일각(一角)에서는 ‘정치 보복 프레임’, ‘국익’과 ‘퇴행’을 구실로 적폐 청산의 피로감을 노래한다. 정말 그럴까? 적폐 당사자와 그 언저리에 기생하는 자가 아니고서야 어느 국민이 불법을 단죄하고 뒷걸음질 친 민주주의를 바로잡겠다는데 피로감을 호소하겠는가?
적폐 청산은 MB의 억지소리처럼 정치보복이나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이고 내일을 기약하는 일이며 국민과의 약속이다. 과거라는 벽을 허물어야 미래의 길이 생긴다.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어서는 안 된다.
세월이 흐른 후에 모든 일은 반드시 제 모습대로 기록될 것이다. 그건 역사가 할 수 있는 심판이다. 세월이 흐른 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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