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그러짐으로 대장간 역사기록
해남우리신문 400호 기념

▲ 아버지에 이어 박판수씨가 사용하는 100년 된 모룻돌에는 부자의 고된 대장장이 삶이 온전히 담겨 있다.

 해남 무형유산자산 제1호 대장장이 박판수(65) 씨가 운영하는 우수영 장터 내 영대장간의 도구들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이다. 100년 동안 사용한 모룻돌, 80년 역사를 자랑하는 집게, 직접 만든 45년의 망치 등 모든 도구의 역사가 깊다.  
모룻돌은 대장간에서 불린 쇠를 올려놓고 두드릴 때 받침으로 쓰는 쇳덩이다.
20세 때부터 아버지의 대를 이어 대장장이 길을 걸었던 박판수 씨의 손에 들린 연장은 그의 인생이다. 
그의 쇠붙이 다루는 솜씨는 정평이 나 제주, 여수, 전북 등의 각종 축제 현장에 초청될 정도였다. 시골 5일장에선 단연 인기였다. 그의 그러한 삶과 흘린 땀을 모룻돌은 긁힘과 찌그러짐으로 기억한다. 

 
 새벽 5시 집에서 나와 해 질 녘까지 두들겼던 망치질. 뻘겋게 타오르는 장작불에 쇠가 달궈지면 아버지는 정확한 자리에 망치질을 하라고 일렀다. 혹여 망치질이 정확한 위치에서 벗어나면 연장을 던져 버리고 나갈 만큼 아버지는 정확한 망치질을 요구했다. 
좋은 석기는 정확한 망치질에서 나온다는 아버지의 대장장이 철학이었다. 아버지에 이어 아들의 망치질을 모룻돌은 온전히 견뎌냈다. 아버지에 이어 아들의 망치질 철학도 모룻돌의 몸에 새겨져 있다.
문내면 신흥리 출신인 그에게 연장은 아버지의 유품이기도 하다. 모룻돌에는 아버지가 운영했던 옥산 대장간의 삶의 나이테에 환갑을 넘은 그의 숨결이 더해졌다. 아버지는 일이 밀릴 때면 옥매광산 대장간에 일하던 광부들을 불렀다. 또 대장간을 찾은 주민들은 농기구 제작 값으로 쌀과 보리를 주고 갔다. 사람들이 몰려들수록 모룻돌은 묵묵히 자신의 몸을 내주며 그 역사를 몸에 기록했다.  
그는 21살 때 제주도로 건너가 철공소 직원으로 일을 했다. 제주도 생활 7년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홀로 계신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옥산대장간 운영과 함께 황산과 우수영, 화원장을 돌며 대장장이 일을 했다. 단골이 늘고, 밀린 일감은 집으로 가져와 제작해 다음 장날에 가져다주곤 했다.
이제 모룻돌은 장날 간간이 찾아온 손님들을 맞는다. 그만큼 자신의 몸은 편해졌지만 사람이 그립다. 대장간 운영은 돈을 벌기보단 삶의 재미라고 했다. 대장간은 소소하게 사라져가는 추억을 사가는 장소라고 했다. 
모룻돌의 몸통에도 녹이 슬었다. 
모룻돌은 그였다. 그가 곧 모룻돌일 수 있었던 시간 동안, 모룻돌도 늙고 그도 늙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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