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도 아들도 이곳에서
해남우리신문 400호 기념

▲ 송지면 산정리에 위치한 일흥모자점은 학생들의 천 명찰 제작으로 한때 명성을 날렸던 송지면의 추억의 장소다.

 “지금도 있네” 송지면 산정리에는 50여 년 된 일흥 모자점이 있다. 추억이 모락모락 되살아나는 가게다. 
이곳에서 가방과 모자를 판매하는 서형용(75) 씨. 한때 일흥모자점은 해남의 명물이었다. 
당시 송지중·고생들의 명찰뿐 아니라 초등학생 명찰은 죄다 이곳에서 제작했다.
해남읍까지 소문이 자자해 신학기가 되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군부대 명찰도 이곳에서 맡았다. 
서 씨는 땅끝에 가까운 중리에서 태어났다. 전북 이리(현 익산시)에서 재봉틀 기술을 배워 서울의 모자집에서 2년간 일을 하다 고향으로 내려왔다.
한자로 고등학생 명찰을 만들던 때 그는 미싱으로 글자를 새겼다. 당시 해남에서 미싱으로 명찰을 제작하는 것은 신세계였다. 따라서 미싱으로 쭉 한자를 새기는 것이 신기해 구경꾼들도 몰려왔다. 
예전에 남성양장은 옷 안쪽에 이름을 새겨 넣고, 여성들은 조끼 안에 수를 놓았다. 따라서 성인들도 새 옷을 장만하면 일흥모자점을 찾았다.

 서 씨는 68년도에 가게 문을 열었다. 당시 초등학교 1개 반 인원은 대략 60~70명, 한 학년당 3개 반이 있었다. 그 아이들의 명찰도 서 씨의 몫이었다. 
그 같은 인연으로 송지면 아이들은 모두 서 씨가 만든 명찰을 차고 다녔다. 50여 년의 역사동안 일흥모자점은 아버지도 그 자녀도, 손자 손녀도 명찰을 차고 다녔다. 
산정에서만 50년간 문을 열었던 일흥모자점, 학생시절 이곳을 이용했던 이들은 “어, 지금도 있네”라며 추억을 되살린다. 명찰뿐 아니라 학생들의 가방과 모자, 체육복 등도 인기 상품이었다. 
안타깝게도 플라스틱 명찰이 나오면서 이제 학생들의 천 명찰은 사라졌다. 서 씨의 미싱 작업도 사라졌다. 브랜드 상품이 인기를 끌면서 학생들의 가방도 사라졌다. 그러나 일흥모자점은 지금도 가방과 모자, 우의, 우산, 장화, 고무장갑, 아이스박스, 양말을 취급한다.

 일흥모자점은 새벽 5시에 문을 열고 저녁 9시에 문을 닫는다. 새벽에 김 작업을 하는 분들이 종종 들러 우의나 장화를 사 가기 때문이다. 
예전의 영화는 사라졌지만 친구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는 일흥모자점, 서 씨는 7평 남짓한 가게에서 50년의 세월을 견뎠다. 
서 씨의 명찰을 달았던 사람들, 그 옛날의 추억을 감사한 마음으로 간직하고 있는 송지면민들 속에 일흥모자점은 추억의 장소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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