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년 4월호 신동아 잡지에 기총소사 최초 밝혀
윤재걸 시인, 보안사에 끌려가 갖은 폭행 당해

▲ 1985년 신동아 잡지 4월호에 광주민주항쟁 기간 계엄군의 헬기 총기난사를 최초로 보도한 윤재걸 시인은 보안사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국방부 특별조사위원회는 지난 7일 ‘계엄군이 비무장 상태인 광주 시민들을 향해 1980년 5월21일과 5월27일 여러 차례 헬기 사격을 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덧붙여 계엄군이 광주에서 헬기사격을 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미국 정부의 문서도 발견됐다. 광주민주항쟁 37년 만에 나온 발표이다. 

 1985년 언론 사상 최초로 헬기 사격을 보도한 기자가 해남에 거주하고 있는 윤재걸 시인이다. 
윤 시인은 1985년 7월호 ‘신동아’ 잡지에 94쪽에 달하는 특별기획으로 ‘다큐멘터리-광주, 그 비극의 10일간’에 계엄군의 총기 사격에 관한 내용을 언급했다.
언급된 내용은 “한편 시민들이 무기고로 몰려갈 무렵, 광주시가지 상공을 떠돌던 군용헬기가 도청 부근을 선회하더니 갑자기 고도를 낮추고는 MBC가 소재한 제봉로 부근에 기총소사를 하기 시작하자, 금남로 부근 골목에서 웅성거리던 시위 군중들은 혼비백산, 길바닥에 엎드리거나 건물 가장자리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헬기로부터 날아온 탄환에 죽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나뒹굴었다”
윤 씨는 1980년 신동아 기자로 재직하다 5·18 취재 건으로 신군부에 의해 강제 해직됐다. 1984년 복직 후 4년여 기간을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진실을 쫓겠다는 일념으로 시민군 출신, 일반 광주시민, 5·18 관련 유족회를 비롯한 관련단체를 만나 기사를 작성했다.

 당시 윤 시인의 기사작성법은 일명 ‘크로스 체크’ 기법이었다. 복수의 취재원으로부터 얻은 이야기 중에 겹치는 부분을 확인하는 방법이다. 특히 당시 고 조비오 몬시놀 신부(1938~2016)의 목격담은 큰 도움이 됐다. 
세로쓰기로 기록된 당시의 10줄의 글은 이후 윤 시인의 삶에 큰 아픔으로 다가왔다. 남시욱 당시 출판국장을 비롯한 동료 기자들은 윤 시인의 안전을 걱정했다. ‘윤재걸 몸조심하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윤 시인은 자신이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하루하루였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두산그룹 동아출판에서 잡지를 인쇄하는데, 새벽에 보안사 사람들이 들이닥치더니 인쇄소 전원을 꺼버렸어요. 그리고 나는 지프차에 태워져 보안사 수사부실로 옮겨졌죠. 사람을 짐짝처럼 다루던 2박3일, 난 집사람에게도 자식에게도 말하지 못할 수모를 겪었습니다. 네 명이 2인1조로 나눠 교대로 구타를 하는데, 옷부터 벗으라더군요. 고무줄 없는, 파자마 같은 지금의 병원 옷 같은 것을 입히고, 군의관이 와서 진찰하는데 수사관에게 혈압이 높다는 이야기를 계속하기를 권유하더라고요. 저보고 또 빨갱이라고 했습니다. 이북 방송을 듣고 그것을 받아 적었다는 거예요. 군인들이 어떻게 시민들을 향해 기총소사를 하겠냐며, 제 말을 믿지 못하겠다고 했어요. 몽둥이로 등짝을 때리면서도 절대로 얼굴은 안 때리더라구요. 얼굴은 맨주먹이나 손바닥으로 때렸어요. 모멸감과 치욕감이 뒤섞였죠. 동아일보 기자다는 자의식을 주문처럼 외웠어요. 정신이 허물어질 수는 없었으니까요.”
남시욱 출판국장과 김병관 당시 부사장이 와서 윤 시인을 데리고 나갈 때까지 밖에선 동아일보 전 기자들의 항의 농성이 이어졌다고 한다. 

 광주 전일회관을 휩쓸고 간 기총소사의 흔적들. 윤 시인은 단 한 사건이 밝혀졌다고 해서 광주에서 일어난 참혹함을 모두 세간에 밝혀진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윤 시인은 무등 갱생원(고아원)과 광주 황금동(술집)을 이야기했다. 모두 소리 없이 사라진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행불자’라 부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흔적은 광주 전일회관의 기총소사의 탄알 구멍과 비슷했다. 친인척 등의 연고자를 찾을 수 없었고, 당시 비밀리에 광주, 전남 전역의 화장터에서 억울한 생을 마감했을 그들을 기억하는 것을 윤 시인은 진짜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윤 시인은 2001년 4월에 민주화보상심의위로부터 민주유공자(1980년 8월 동아일보 강제해직 건)와 민주상이자(1971년 10월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 배후조종 고문후유)로 인정받았다. 
현재 고향 옥천면에서 집필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지난해『유배공화국, 해남 유토피아!』시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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