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해전은 1597년 음력 9월16일 일어난 전투이다. 이순신이 다시 수군통제사로 임명된 날이 같은 해인 8월 3일이다. 이순신은 43일만에 칠천량 해전에서 전멸된 수군을 복원해 명량해전을 치러야 했다.

무슨 이유에선지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수군을 전멸시킨 일본군은 곧바로 서해로 향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이순신에게 수군을 재건하고 전쟁을 준비할 시간을 벌어준 셈이다. 칠천량 해전에서 도주한 배설의 배 12척을 인수한 이순신은 곧바로 전라도 바다로 향한다.

임진왜란 초기에도 조선수군의 주력은 전라도 수군이었다. 한산도 대첩 등 굵직한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은 이순신의 전라좌수군과 이억기가 이끈 전라우수군이었다.  

육지에서는 호남 의병들의 활약도 두드려졌다. 일본 전국시대를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명나라를 치기 위한 길목쯤으로 여겼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생각대로 조선은 한 달 만에 한양을, 두 달 만에 평양을 내주고 임금인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떠나는 등 짧은 시간에 무너졌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생각하지 못한 점이 있었다.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뒤로한 채 육군의 주력부대를 부산에서 한양으로 향하게 한 것이다.

조선 7도가 유린된 가운데서도 곡창지대인 전라도는 유린되지 않았고 호남의병들은 한양으로 향하는 일본군을 후미에서 공격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의 70%가 호남사람들이었다.  

120년간의 전국시대를 거쳐 온 일본인에게 있어 조선 의병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일본의 주력군은 용병, 봉토를 조건으로 전쟁에 참가한 이들에게 있어 아무런 조건 없이 나라를 구하겠다고 나선 의병 자체를 이해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또 바다에서는 뜻하지 않는 명장 이순신이라는 복병을 만난다. 이순신으로 인해 서해 진출이 차단되고 부산과 대마도간의 보급선도 위협을 받게 된다.

육지에서는 호남의 의병, 바다에서는 전라도 수군과 이순신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유재란 시에는 수륙양육 작전을 수행하고 주력부대를 전라도로 향하게 한다. 따라서 정유재란 때는 해남도 전란에 휩싸인다.

삼군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된 이순신이 순군 본영인 한산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전라도로 향한 것은 호남의 저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호남에 이르러야 흩어진 수군들을 다시 모을 수 있고 전쟁물자들을 보급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었던 것이다.

실제 이순신이 순천에 이르렀을 때 정예병 60여명이 모여 무장했고 보성에서는 120명으로 군사가 늘어난다. 명량해전을 주도하기까지 병선수리는 물론 일체의 병기와 군량 등이 현지에서 마련된다.

이순신이 진도 벽파진에 이르자 해남사람들도 명량으로 향한다.

동복오씨인 오극신과 계적 부자, 극신의 조카인 홍적도 명량대첩에 참여하는데 오극신은 아들 계적과 함께 참가한 명량해전에서 전사한다. 이들을 기념하는 동상이 명량대첩 유적지 기념공원에 세워져 있다.

산이 노송면 출신인 김안우(1554~1664)는 종형 안방과 함께 어선을 군선으로 가장해 아군의 군사력을 과시하는 한편 군수품을 조달한다.

명량으로 몰려오는 민초들에게 이순신은 피할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선 100척은 피하지 않고 먼 바다에서 전쟁을 지켜봤다.

일본군의 입장에선 병선으로 오해할만 했다.

명량해전은 해남진도 민초들과 관련된 숱한 전설을 남긴다. 아녀자들의 강강술래와 노적봉 전설, 야적불 등 이순신이 군사가 많음을 보여주기 위해 꾸몄던 전술이라는 설화내용이지만 이는 민초들의 역할을 대별해 준다.

또 복귀 후 이순신이 전라도로 향한 것은 명량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배설의 배 12척을 인수한 이순신은 장흥 회령포에 이르러 폐선 1척을 수리해 13척으로 수군진용을 갖추고 이진(북평면 이진), 어란포(송지면 어란)를 지나 8월 29일 명량 입구인 진도 벽파진에 이르러 명량해전 전일인 9월 15일까지 정박한다.

이순신이 최후의 방어선으로 지목했던 명량해역은 임진왜란 시기인 1593년 7월 수군의 본영을 한산도로 옮겨갈 때 명량으로 이전하자는 안이 거론된바 있다.

영암출신 김극희는 한산도는 지형이 넓어 적에게 쉽게 드러나지만 명량은 적이 통과하지 못할 길목인데다 바다의 형세가 우회(迂廻)하여 지척에서도 분별하기 어려운 곳이라며 본영을 명량으로 옮길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순신도 13척의 배로 대규모 일본전선을 맞아 싸워야할 곳은 명량뿐이라는 사실을 일찍이 인지한 상태였다.

명량 즉 울돌목은 병법에서 보면 사지(死地)이다. 사지는 전쟁에 불리했을 때 퇴각하는 길마저 막아버리기에 그것은 전멸을 의미한다. 이순신이 주둔하고 있었던 진도 벽파진은 사지인 울돌목을 뒤에 두고 있다. 따라서 이순신은 명량해전이 일어나기 하루 전인 9월 15일 전라우수영으로 진을 옮긴다.

여기서 잠깐 영화 ‘명량’으로 돌아가보자. 영화에선 조선수군이 울돌목에서 일자진을 형성하며 일본군을 기다리는 장면이 잠깐 나온다.

일자진은 목을 빈틈없이 틀어막을 수 있는 조건에서 효과적인 진형이다. 따라서 견내량과 같이 협수로인 울돌목에서 이순신이 일자진을 형성했을 것이란 추정은 그동안 일반 설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군사 전문가들은 울돌목의 협수로엔 5대 이상의 배가 나란히 들어올 수 없다고 본다. 또 울돌목 협수로는 센 물살 때문에 일자진이라는 진형을 형성하기 어렵고 판옥선과 같이 큰 배는 지형이 좁고 암초가 많은 곳에서 싸우기 힘들다는 점도 일자진을 부정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실지 이순신은 협수로인 견내량에서도 싸우지 않았다. 견내량에 있는 적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해 학익진으로 섬멸했다.

관객 1500만을 돌파한 영화 ‘명량’이 명량해전의 역사적 현장인 해남에서 오는 29일 오후 3시 30분과 7시 등 두 차례에 걸쳐 상영된다. 명량대첩에 대한 이해를 한 후 관람하면 그 감성이 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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