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성 훈(우리신문 시민기자)

 천변 산책로를 따라 금강골을 향해 걸었다. 앞서 고양이 한 마리가 종종걸음으로 걷고 있다. 검은색 털고양이 등에 듬성듬성 흰색 털이 볕에 비춰 보드랍게 보였다. 특별히 고양이를 해코지할 이유도 없고, 나는 가볍게 산책하고 싶다는 목적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고양이는 걷다 멈추며 자꾸 힐끔거리며 뒤돌아 나를 봤다. 외길이라 달리 달아날 방법도 없었나 보다. 나보다 좀 더 빠르게 뛰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어 보였다. 
고양이를 특별히 의식하고 걷는 것이 아니어서 나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존재 자체가 상대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자각했다. 그 사람이 어떤 마음을 품은 지 알 수 없는 상태라면 경계 태세가 되고 빨리 위급함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당연했다.
30대 청년이 되어 돌아온 고향 해남에서 관(官)을 대할 때 내 마음은 고양이와 같았다. 행정 처리를 해야 하거나 무언가를 해결해야 할 때, 나는 왜 쭈뼛쭈뼛 털을 곤두세웠을까. 개별적으로 기관 공무원과 만나는 것이 아닌 까닭에 관계는 업무적일 수밖에 없었다. ‘업무적이다’는 서술 하나로 나는 민원인이 됐다. 
민원인을 대할 때는 되는 것과 되지 않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되지 않는 것을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오히려 되는 것도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나만 그럴까.
청년이 돌아오는 전남을 위해 전남도에서 프레임을 걸고, 해남도 그에 걸맞게 청년협의체가 구성됐다. ‘청년’이란 낱말은 무겁지 않지만 결코 가벼운 말은 아니다. 
그러나 해남에서 ‘청년’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저 지역에 눌러살아야 하는 통계치 값은 아닐 듯하다. ‘청년’이라는 주제로 군수 후보들과 토론회를 가졌다. 수많은 말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뿐일까.
민원인이 불만을 접수하는 것처럼 그저 ‘업무적’인 관계일까. 되지 않을 것들을 먼저 들어야 하는 불편한 자리일까. 청년과 함께 일을 추진했다는 가시적 성과를 얻기 위해 짜놓은 계획서를 들이미는 것은 어떤 태도일까. 
테이블에 청년을 앉히기 어렵다는 말은 되지 않는 이유를 나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6·13 지방선거 이후 해남은 청년을 어떤 모습으로 마주할까? 마을별 청년 조직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그 청년들이 마주 앉아 군정에 반영되는 정책을 끌어내는 이행과정에 무엇이 필요할까. 그 대상이 발언을 했을 때 군(郡)은 어떤 자세로 듣고 정책에 반영할 것인가. 
청년들이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눌 의자를 놓는 것 자체부터, 공간을 꾸미는 것 자체부터, 주최와 운영은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 자체부터, 들을 수 있는 공론의 장 마련을 군은 시도해야 하지 않을까.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정신 심리학자 빅터프랭클은 무의미적 가치에서 의미적 가치로 도출될 때 사람은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다고 했다. 
청년이 없다는 말보다는 청년을 자리에 앉혀 그들이 스스로 의견을 낼 수 있는 가치를 당선자들은 고민해야 한다. 
이번 선거에서 청년들이 투표한 여러 이유 중 하나가 ‘가치 모색’임을 당선자들은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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