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 태 정(땅끝문학회 회장)

 광주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시선이 향한 길 끝에는 구름이 하얗게 걸려있었다. 연일 내렸던 비 때문인지 초록의 산도 상큼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먼 곳을 응시한 눈은 콧노래를 불러왔다. 
내비게이션에서 들려오는 최저가 주유소라는 말에 서둘러 주유소로 들어갔다. 
나는 하얀 하늘의 선명함에 넋이 빠져 있었다. 앞 차들이 주유를 하고 빠져나간 뒤 차를 세우고 시동을 껐다. 주유원이 올 때가 됐다 싶은데도 내 차는 투명차인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경음기를 울렸다. 한 번, 나타나지 않았다. 또 한 번.
“왜 자꾸 빵빵거려요?”
주인인 듯한 남자가 다가왔다. 나는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그 사람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의 시선은 ‘너야말로 왜? 그런 소리를 하느냐?’는 거였다. 
“모르셨나요. 여기는 셀프주유솝니다. 다들 운전자들이 직접 넣잖아요.” 
사내는 손으로 도로 저편에서 반대편까지 쭉 손을 뻗치면서 
“이쪽 전부가 셀프예요. 요새 아르바이트를 쓸 수가 없다니까요. 아마 모든 주유소가 셀프로 바뀌는 건 시간문제일 겁니다.” 
셀프라는데 나는 차에서 내렸다. 사내는 셀프가 처음이냐고 묻더니 앞으로 많이 필요할 거라며 사용법을 가르쳐주었다. 
최저임금이 오르면서 보이는 풍경의 하나다. 정부가 최저임금을 올린 것은 분명히 아르바이트생과 투잡 쓰리잡을 뛰어야 먹고 사는 사람들을 위해 단행한 조치일 것이다. 그러나 그 최저임금이 오히려 일자리를 없애버리게 되는 역설적 상황을 가져오고 말았다. 그나마 몸으로 뛰면서 벌던 일자리마저 사라져버린 셈이다. 
제 밥그릇은 제가 갖고 태어난다던 옛말은 더 이상 통용이 되지 않는 말이 돼버렸다. 
부지런하기만 하면 다 먹고 살 수 있다는 말도 아버지 대 얘기가 되고 말았다. 지금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거나 그야말로 살인적인 경쟁률을 뚫고 정규직이 되어야만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그렇지 않으면 창조적인 자영업으로 성공 신화를 쓰든가. 
눈높이를 낮춰 일자리를 구하려 해도 쉽지가 않다. 농촌 들녘을 보라, 그건 이미 외국인 노동자들에 의해 점령이 돼버렸다. 
대학을 다니고 있는 아들은 몇 년 후 다가올, 전쟁 같은 취업전선에 대해 어떤 생각일까? 군 입대도 남았으니 아직 발등의 불은 아닌가 보다. 살면 살수록 각박해져만 가는 건 왜일까? 외국인노동자와의 경쟁에 이어 AI 같은 사이보그와도 맞짱을 떠야 하는 불쌍한 청춘들. 
옛 선비들처럼 자연을 벗 삼아 막걸리 한잔에 안빈낙도를 읊으면 현실은 먼지처럼 하찮은 일이 될까? 그간 윗동네가 하는 일에 대해 예민한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봤자 궁벽한 이곳에서 바뀐 정책을 체감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요돼 그 연관성을 인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셀프가 주유원을 밀어내는 풍경이 흰 구름보다 더 선명하게 펼쳐지기 시작했다. 
개인의 능력만을 탓해야 할까? 그렇다면 이 땅의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스스로 능력 없는 루저라고 한탄을 해야 할까? 
인간은 일을 통해 자존감과 자아를 형성해간다. 그 많은 젊은이들이 일을 하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속된 이야기 같지만 돈이 사람을 만들고 사람 구실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100년 후 대한민국 인구는 지금의 절반으로 줄어든다고 한다. 먹이가 줄면 개체수를 줄이는 초원의 생태계를 보라. 건물 숲에서 허우적대는 인간도 결국은 초원의 벌거벗은 동물이다.  
초록의 산과 하늘의 흰 구름을 바라보는 눈은 결국 한가한 눈인가. 가슴만 데우고 있을 뿐, 나 또한 대안이 없다. 소상공인, 자영업자, 노동자 모두 하늘을 바라보며 웃는 날은 정녕 낯선 풍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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