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 태 정(땅끝문학회 회장)

 1년 동안 텃밭 농사를 지었다. 마당가 석축 아래 위치한 우리 텃밭은 사람 외에는 내려갈 수가 없다. 퇴비를 넣고 갈아엎는 일과 두둑을 만드는 일 모두 곡괭이와 삽을 동원해야 했다. 그야말로 농기계가 없던 70년대식의 막고 품기식 농법이다 보니 내가 소도 되고, 트랙터도 되어야 했다. 곡괭이질 사이사이 팍팍한 허리를 두드리다 건너편 너른 밭을 보면 트랙터는 숫제 달려 다녔다. 
그에 비해 내 작업은 두더지 수준의 기어가는 꼴이었다. 트랙터 10분 일거리가 두더지에겐 하루 종일 일감이었다. 
통일트랙터 품앗이 해남군운동본부 출범식을 앞두고, 문화제 준비를 위한 예비 모임이 있었다. 예총, 민예총 등을 망라해 여러 예술인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그들과는 그간 교류가 거의 없어 어쩌다 행사장에서 만나도 데면데면 해왔기에 살갑게 이야기 나눠본 적이 없었다. 그것을 의식했음인지 식당으로 자리가 잡혔고, 몇 순배 술이 돌자 선·후배, 형·동생이 되어 있었다. 
트랙터가 내려갈 수 없는 텃밭처럼 결국 그들과는 술 한잔 마실 기회를 만들지 못했던 것이다. 서로 술로 로터리를 치면 섞어질 것을 그렇게 살아왔던 것이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가슴으로 노래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보수 정권을 거치면서 통일은 색이 바랬고, 가슴보다는 입으로만 외치는 ‘대박’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통일은 순진하게 가슴이 덜 식은 진보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다. 
올해 벽두 평창동계올림픽을 거치면서 2차례의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이 극적으로 성사됐다. 문학 작품 속 상징처럼 두 정상이 손을 맞잡고 군사분계선을 넘나들었다. 꿈속 같은 그 장면에 눈물 나도록 감격했던 우리는 얼마나 많은 박수갈채를 보냈던가.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가며 그 장면을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았다.  
이제 남북 사이를 가로막은 묵정밭 갈아엎으려고 통일트랙터가 시동을 걸고 있다. 전국 지자체별로 2대씩을 준비한다면 총 500여 대의 트랙터가 줄을 잇고 휴전선을 넘으리라. 두더지 하루 품을 10분에 해치우는 일꾼이고 보면 북녘 들판이 보송해질 날도 멀지 않았으리라. 통일소 500마리에 이어 통일트랙터 500대가 휴전선을 넘게 되는 것이다. 
남과 북은 한 겨레지만 70년이 넘는 세월을 서로 총부리를 겨누면서 살아왔다. 온 국토가 폐허가 되고, 죽고 죽여야만 하는 전쟁을 치렀던 시절이 있었다. 전쟁으로 치달을 수 있는 일촉즉발의 위기를 조마조마 넘겨야 했던 때도 있었다. 그랬던 남과 북이다. 그러기에 통일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신뢰감 회복이 우선이다. 통일트랙터는 그 출발이다. 
통일트랙터 품앗이라고 했다. 이를 두고 한쪽에서는 퍼주기라고 매도한다. 품앗이는 서로의 품을 교환하는 것인데 그러면 남은 북으로부터 어떤 품을 앗아올 것이냐는 얘기일 터다. 우리는 그간 얼마나 큰 전쟁의 공포 속에 떨어야 했던가. 그 공포가 일상이 되어 이미 무뎌졌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북으로부터 앗아올 것은 평화이다. 남북 군사합의로 허물어버린 전방초소 GP처럼 비핵화에 이어 종전선언까지 이끌어낸다면 그보다 더 나은 품앗이가 어디 있겠는가. 평화보다 값진 게 어디 있겠는가. 묵정밭이 된 들녘에 평화의 씨를 뿌리러 통일트랙터가 올라가는 것이다. 
지난 19일에는 통일트랙터 품앗이 해남군운동본부 출범식이 있었다. 한반도 끝에서 끝인 땅끝에서 온성까지 트랙터를 몰고 올라가 통일을 앞당기자는 결의가 끓어올랐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일은 정치색과 개인의 신념을 뛰어넘어 모두 한 목소리로 뭉쳤다는 점이다. 다시 우리의 소원 통일을 앞두고 통일 일꾼이 된 트랙터가 군사분계선을 넘어가는 것을 상상해보라. 거기에 남북 철도가 이어지고, 도로가 이어지는 날을 그려보라. 기차를 타고 유럽을 가는 날이 그리 멀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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