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명량’으로 인해 오는 10월 8일부터 12일까지 열리는 명량대첩축제는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을 것으로 전망된다.

영화 명량은 이순신이라는 영웅과 함께 서남해안 민초들의 애국혼을 남겼지만 바다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영화이기도 했다.

울돌목은 명량해전 이전인 고려말 삼별초의 활동무대였다. 이들이 대몽항쟁의 최후 거점지로 진도를 선택한 것은 서남해안 해로에 있었다.  

울돌목의 거친 조류는 방어에 유리했고 일본 및 중국과 교류하는데도 유리했다. 실제로 삼별초는 일본에 국서를 보내 대몽연합전선 구축을 제의한다.

삼별초는 13㎞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의 용장산성을 쌓고 서남해안의 해상 조운로를 장악해 재정을 확보, 호남과 영남일대까지 영토를 확장한다. 물론 삼별초가 진도에 세운 오랑국은 10개월 만에 고려정부와 원나라의 연합군에 패망하지만 이들은 울돌목의 중요성을 익히 알고 있었다.

바다가 천시되고 육지 중심의 교통이 열리면서 해남은 변방의 땅끝이 되지만 해남의 찬란한 역사에는 늘 바다가 있었다.

기원전 3세기 경 해남의 해상세력들은 중국과 일본, 가야와 활발한 무역활동을 하며 송지면 군곡리에 거대한 해양도시를 건설했다. 이 도시는 기원후 4세기까지 존속, 700년간 서남해안의 강력한 해상세력으로 군림했다. 해남에 남아있는 고대고분군도 모두 고대사회 때 바다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해상세력들이 남긴 유산이다.

장보고가 완도 청해진에 해상왕국을 건설했던 통일신라 말, 해남 화원면 도요지에서 초기청자가 생산된다.

현재까지 밝혀진 것만 60여기, 당시 규모면에선 전국 최대이다. 가마 한 기당 인부만 20명. 대량으로 생산된 청자를 전국으로 공급하려면 거대한 선박과 유통구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강력한 해상세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고대 바닷길에서 해남은 서해와 남해를 L자로 연결하는 요충지였고 당연히 한·중·일 고대문화 이동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이점 때문에 고려시대 때 화산면 관동항은 고려정부와 중국과의 공식 무역항 역할을 했다.  

물론 바다는 외침의 역사도 함께 간직하고 있다. 일본은 수시로 서남해안을 침략해 노략질을 일삼았다. 일본 해적의 노략질은 명나라도 위협했다. 이에 명나라는 해금정책을 취하고 명나라의 영향으로 조선도 해금정책을 취한다. 또 조선은 섬을 비우는 공도정책(空島政策)을 실시해 섬사람들을 강제로 육지로 이주시켰고 모든 해상활동을 전면 금지했다. 개방 코드가 아닌 철저히 폐쇄 코드로 전환한 것이다. 조선이 해금정책을 취하자 왜구의 침략은 더 거세진다. 1555년 북평면 남창으로 왜구가 쳐들어온 달량진 사변이 그 예이다. 인근 강진과 장흥, 진도가 철저히 왜구에 짓밟힌 사변이었지만 조선은 이후에도 여전히 해금정책을 취하며 바다를 천시했다.

조선의 해금정책과 달리 서양은 16세기 이후 대항해 시대를 여는 진취성으로 근대화를 선도해 나가고 일본도 이를 선진적으로 수용한다. 그러나 해양을 장애물로 여긴 조선은 결국 임진왜란이라는 수난을 겪게 된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이순신이다.

바다의 중요성과 바다를 이용한 전략을 수립할 줄 알았던 이순신은 울돌목이 가진 이점을 알고 있었다.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막을 수 있는 곳은 협수로인 울돌목밖에 없었다. 또한 서해와 중국으로 향하는 길목인 이곳이 뚫리면 한양도 명나라도 온전치 못할 것임도 알았다.

바다를 천시한 결과가 어떠한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도 조선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바다를 천시한 정책, 해금정책은 조선에 일제강점기라는 식민지시대를, 명나라에는 청나라에 나라를 내주는 비운을 맞게 한다. 그리고 해남의 찬란했던 해양문화도 자취를 감춘다.

바다를 장악한 자 천하를 장악한다는 말을 뒤로 하더라도 명량해전은 바다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전쟁이기도 하다. 또 개방성이 아닌 폐쇄성이 한 국가를 위기에 빠뜨릴 수 있다는 점도 일깨워준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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