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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은 1443년 12월(세종 25),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사들과 창제해 반포됐다는 것이 정론으로 여겨지고 있다.
한글의 글자 기원에 대해 조선전기 학자 성현(1439~1504)은 그의 저서「용재총화」에서 “훈민정음은 범자(梵字, 산스크리스트어)에 의해 만들어 졌다”고 했고, 조선 후기 언어학자 황윤석(1729~1791)은 “우리 훈민정음의 연원은 대저 범자에서 근본하였으며, 범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과연 집현전 학사들 중에 범자나 서장어 등에 능통한 사람이 있었던가? 당시 대표적인 학사들은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등인데, 최항은 세종16년(1434)에 알성시 장원 급제해 1443년 한글이 반포될 때에야 집현전 학사가 되었고, 신숙주는 1439년(세종21) 문과에 급제하고 집현전 부수찬이 되었다가 1442년 훈련주부가 돼 일본에 서장관으로 건너갔다.
박팽년은 세종16년(1434)에 문과에 급제해 집현전 학사가 됐고 성삼문은 세종20년(1438)에 문과에 급제했기에 한글창제에 주도적으로 일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성삼문, 신숙주가 한글 창제의 주역이라는 말은 없다고 여증동 경상대 국문과 교수는 말하고 있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창제(1443) 4년 전부터 자주 병석에 누워있었고, 집현전 학사들 모르게 누군가에게 한글 창제를 시켰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집현전 부제학 실무담당인 최만리는 훈민정음이 반포되자 2개월 후에 ‘이제 여럿의 의논도 듣지 아니하고, 가볍게 옛 사람이 이미 이룬 운서(韻書)를 터무니없는 언문(諺文)으로 억지로 들어 맞추고…’ 등 6가지 이유를 들어 한글창제 반포에 대해 반대 상소문을 올렸다.
집현전 학사들은 한글 창제에 대한 깊은 이해도 못하다가 한글 창제가 공식화 되자 신석조, 김문, 정창손 등 집현전의 기성학사들은 격렬히 반대한 것이다. 그리고 세종대왕 사망 후 집현전 학사들은 한글을 화장실에 앉아서 배우는 뜻의 ‘통시 글’이라 멸시했다. 과연 학사들이 만들었으면 스스로 한글을 비하하겠는가?
최근 한글창제의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나타나고 있으며, 당시 범어나 서장어에 능통했던 누군가가 한글 창제에 깊숙이 개입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현재 40여 년간 속리산 복천암 주지 소임을 맡고 있는 월성(月性)스님은 김수온이 썼다는 ‘복천보장’과 영산 김씨 족보 등을 통해 이러한 사실들을 밝혀가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범자에 능통해 창제에 관여한 사람은 누구일까? 당시 속리산 복천암(福泉庵)에 주석하였던 신미(信眉.1405~1480?) 스님을 지목한다. 신미스님은 충북 영동에서 태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훈의 장남으로 태어나 일찍이 유학경전을 익히고, 과거에 급제해 집현전 학사가 되기도 했다. 홀연히 출가해 속리산 법주사에서 대장경을 익혔으며, 한글보다 더 까다로운 자음모음 체계이자 소리글자의 근원인 범어에 능통해 불경 해역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깊은 병세에서 다소 회복한 세종은 1450년 1월 26일 신미스님을 조용히 궁에 들게 했다. 세종은 속리산 복천암의 중창을 도우면서 스님에 대해 ‘선교 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 라는 긴 법호를 친히 내렸다. 여기서 우국이세(祐國利世)는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이롭게 했다’는 의미로 이는 한글창제에 대한 공을 치하한 것일 것이다.
--복천암 사적기에는 “세종은 복천암에 주석하던 신미대사로부터 집현전 학사들에게 범어의 자음과 모음을 설명하게 했다”고 적혀있다. 문종의 동생인 세조임금은 신미스님을 스승으로 대우해 간경도감에서 언해한 여러 경은 모두 이 스님과 함께했으며 석보상절의 편집을 실질적으로 이끌도록 하였던 것이다. 속리산의 정2품 소나무는 이때 세조가 신미스님에게 찾아갈 때의 이야기이다.
방대한 양의 불경이 한글이 창제 된지 얼마 안 되는 기간에 한문본이 편찬되고 번역까지 되었다는 것은 한글 반포 이전부터 불경에 정통하고 있었으며, 또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의 운용법과 표기법에 통달하고 있던 인사들이 있어 가능했다는 증거이다. 그럼에도 조선왕조실록에서 스님에 대한 기록은 ‘간사한 스님(姦僧)’으로 내몰고, 훗날 문종은 유학자들의 심한 질시로 ‘우국이세’를 뺀 시호를 내리게 되고, 그가 번역한 경전마저 초판본에는 신미스님의 법호가 있으나, 재판 본에는 삭제되는 비운을 남긴다.
영산 김씨 족보에는 ‘수성(신미대사)은 세종 때 집현전 학사로 활동했으며,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고 기록돼 있다고 한다.
해남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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