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남주(국민대 교수)

 “따르릉” 십여 년 전 교육자인 해남출신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땅끝 해남의 정신이 무엇인가?” 그때부터 해남인이 지향하여야할 해남정신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역사적으로 해남 인물인 금남 최부, 미암 유희춘, 석천 임억령, 고산 윤선도 등이 떠올랐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와서는 도올 김용옥 선생을 들고 싶다. 그의 진취적인 철학과 사상을 실천하는 대담한 용기를 해남인들이 표상으로 삼았으면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올은 어떤 사람이며 해남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아보자. 
먼저 도올 김용옥 선생(1948~)은 우리 시대 민족의 등불이라 평가하는 이들이 많다. 도올 선생은 부정과 불의한 일에는 촌철살인 사심없이 비판을 가한다. 그 대상은 살아있는 최고의 권력자도 예외가 아니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사상가이자 동양 철학가이다. 1960년대 당시는 우리나라에서 동양철학은 학문취급도 받지 못했으나 도올은 동양고전에 뜻을 두었다. 도올은 목사를 꿈꾸고 한국신학대학에서 공부하다가 고려대학교 철학과로 적을 옮겨 처음에는 서양철학을 전공했지만 서양철학 계몽주의 사조를 뛰어넘는 동양철학을 발견하고 동양철학 전공으로 졸업했다. 그 뒤 그는 토착적 철학비전을 세계화시키려는 꿈을 실천한다. 국립대만대학에서 노자철학으로 석사를, 일본 동경대학에서 왕부지의 우주론으로 석사를, 이어 미국으로 건너가 하바드대학에서 동·서양 고전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귀국해 40대에 원광대에서 한의학을 만학하여 한의사가 되었다. 도올의 방대한 저술은 다산 정약용을 능가하며, 무도인, 예술가의 길도 걷고 있다. 『노자와 21세기』, 『논어한글역주』등 유학, 기독교, 불교, 무술(태권도) 등에 관한 80여 권을 저술했다. 게다가 농업이 무너지면 국가가 무너진다는 농자천하지대본 사상도 갖고 있다.
도올 선생은 충남 천안에서 태어났으나 뿌리와 사상은 전라도 해남이다. 부친 김치수(1906〜1992)는 해남사람이고 모친은 광주 홍안과의 딸 희남(1910〜2004)이기 때문이다. 
김치수는 해남 계곡면 성진에서 화순 동복군수를 지낸 김영학과 해남윤씨 사이에서 태어나 10대를 보냈다. 김영학(1876~1941)도 계곡면 당산리 372번지에서 출생했는데, 일제강점기 시국이 어수선하여 작은 아들 치수는 공부시키지 아니하려하였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치수는 아버지의 금고에서 300원(1920년대 소 1마리=15원)이라는 거금을 꺼내 단신 상경하여 휘문고보, 연세의전을 다녔다. 
이때 광주 홍안과 할아버지가 사윗감으로 삼고자 일면식이 없는 휘문고보생 치수의 뒤를 따라갔더니 인척인 풍산 홍씨 집에 살고 있어 천생연분이라며 사위로 삼았다한다. 그리고 결혼 후 3년을 계곡 성진에서 살다 서울 돈암동으로 이사했다. 치수는 세의전을 나오자마자 해남읍에다 광제의원을 개업하였다. 이때 장남 용준(1927~, 유기화학자)을 낳았다. 이어 치수는 병원을 천안으로 옮겨가서 6째로 막내인 도올을 낳았다. 도올의 부친과 조부가 해남 사람이 된 것은 증조부 김중현이 겪은 기상천외한 인연 때문이다. 1882년 임오군란 때 김중현은 창덕궁 돈화문을 지키는 수문장 군졸이었다. 허둥지둥 난리 속에 명성황후를 업어서 누이라 속이고 창덕궁에서 무사히 탈출시켰다. 그것은 순수한 측은지심의 발로였다. 나중에 정권을 다시 장악한 명성황후는 김중현을 찾아 해남현감에 제수하였던 것이다. 
이후 김중현은 종2품까지 올랐으나 연동(고산 전시관 자리)에 터를 잡고 모친을 모시고 와 해남을 고향으로 삼았다. 부친의 묘를 충북 제천에서 북평 남창으로 이장하고, 백포리 해남윤씨의 딸을 며느리로 맞이했다. 자신도 옥천면 흑천리에 묻혔다. 아들인 김영학의 부부 묘는 계곡면 성진에 있다. 도올 선생은 “해남의 기운을 타고났다”고 자랑하면서 해남에 애착이 깊다. 또 증조부가 사랑한 해남을 사실상 자기 고향이라 여기고 있다. 
 도올의 품성 즉, 진취적 기상과 개척정신, 불굴의 용기야말로 땅끝 해남인이 지녀야할 정신이 되었으면 한다. 더 나아가 도올 선생의 기상을 해남의 브랜드로 만들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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