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상감청자 이전에 고려인들의 생활 속에 깊숙이 파고들었던 자기는 산이면과 화원면에서  생산된 해남청자였다. 해남청자는 전국의 박물관에 소장돼 있고 고려초기 유적지에선 어김없이 발굴된다. 고려시대 초, 300년 동안 풍미했던 해남청자는 고려 상감청자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고 질이 낮다는 의미의 녹청자로 불렸다. 
그러나 산이면에서 나온 철화청자는 상감청자와 전혀 다른 색과 질감을 보여준다. 너무도 귀족적이고 정교한 상감청자와 달리 철화청자는 고려인들의 자유로운 기질과 호방성이 깃들어 있다. 산이면에서 처음 제작된 철화청자는 전국으로 유통됐다. 그 기술도 전국으로 옮겨졌다.
당시 청자는 최첨단 산업이었다. 이러한 첨단 산업이 해남에서 발전했고 그 기술이 강진의 상감청자를 탄생시켰다.

 해남에는 고려시대 초 가마터가 200여 기 존재한다. 그러나 이중 3기만 발굴이 됐다. 철화청자의 탄생지인 산이면 도요지는 지금도 훼손이 진행되고 있다.
고흥군은 분청사기 박물관을 건립해 고흥에서 생산된 분청사기를 알리고 있다. 
다행히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고려난파선, 해남청자를 품다’ 특별전을 통해 해남에서 생산된 청자를 녹청자가 아닌 해남청자로 명명했다. 그리고 해남청자가 전국으로 유통되며 당 시대의 으뜸 도자기로 자리 잡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예술작품도 시대에 따라 변한다. 해남청자는 상감청자 이전 그 시대의 대표적인 예술품이었고 그 시대의 미적 감각이었다. 해남청자가 이름을 찾는 지금, 해남에 존재하는 가마터 보존과 발굴조사 작업이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아무리 위대한 선조가 있은들, 그 선조가 아무리 위대한 유물을 남긴들, 후손이 변변치 못하면 그 가치는 빛을 발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해남의 가치를 찾는 것은 지금시대를 사는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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