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이 고려청자의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 신청에 해남청자를 넣을 것을 권장한 것은 고려청자의 시발점이 해남청자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학계에선 산이면에서 생산된 해남청자를 질이 낮은 조질토기로 평가 절하해 왔고 화원지역 집단 가마터가 고려청자의 시발점이라는 데에서도 애매한 입장을 표명해왔다. 강진군 및 부안군의 고려상감청자에 밀려 빛을 보지 못했던 해남청자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노력으로 40여 년 만에 빛을 보게 됐다. 바다에서 인양된 완제품 청자만 4만5000여 점, 고려시대 초기 최고기술로 빚은 청자들이었다.
아쉽게도 해남청자는 해남에서도 대접을 받지 못했다. 70여 기에 이른 화원면 가마터는 지난해야 1기만 발굴조사가 이뤄졌고, 106기가 존재하는 산이면 가마터는 1983년 우연히 발견된 1기 발굴로 그쳤다.
한 곳에서 한 시기에 이렇듯 많은 가마터가 존재하는 것은 해남이 유일하다. 또 해남군에서 처음 생산된 고려청자 기술은 전국으로 전파돼 고려청자 시대를 활짝 열어냈다. 그러나 산이면 집단 가마터는 사적지 지정 후에도 관리가 안 돼 훼손이 이어졌다.
유네스코 등재는 해남청자의 가치와 함께 가마터의 보존이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가마터 보존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고 또 어떻게 보존해 나갈지가 중요하다.
해남청자가 지금에 이르러 가치를 조명받고 있지만 해남의 청자기술이 어떤 경로를 거쳐 전국으로 거쳐 갔는지는 발굴조사를 통해서만이 구체화 시킬 수 있다. 또 산이면의 청자와 강진 상감청자와의 관계, 산이면에서 생산된 철화청자의 가치를 조명할 수 있다.
강진이 상감청자의 고장이라면 해남은 철화청자의 고장이다. 철화청자는 상감청자 이전, 고려 상류층이 가장 선호했던 청자였다. 산이면의 철화청자 기술이 전국으로 전파돼 고려초기 철화청자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해남군은 해남청자의 유네스코 지정 등재를 위해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마련한 해남청자 학술대회를 적극 지원하고 나섰다. 늦었지만 다행이다. 산이면과 화원면에 분포돼 있는 200여기에 이른 가마터에 대한 재조사와 함께 발굴작업이 활발히 추진돼야 한다.
해남의 역사는 학자들이 아닌, 이곳에 살고 있는 우리가 보존하고 가꿔나가야 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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