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미(행촌문화재단 대표)

 가을은 숲과 나무가 가장 깊고 아름다운 경이로운 계절이다. 까막눈 농부에게 쓸모없는 풀로만 보였던 온갖 식물들이 이제야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고 나선다. 줄기에 가시를 달고 있으면 아카시아라고 생각해 보이기만 하면 무섭게 뽑아내던 작은 나무들이 산초나무인 줄도 알게 되고 돈 주고 화분을 사다 열심히 물주고 가꾸던 식물들이 알고 보니 무심코 매일 지나던 길에, 숲속에 지천일 줄이야.
넝쿨로 번지면 모두 잡풀로 생각하고 어릴 때 뽑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던 넝쿨과 작은 풀들이 귀한 약초이고 메마른 땅을 덮어주고 심지어 여름꽃보다 아름답고 경이로운 꽃들을 보여줄 줄은 미처 몰랐다. 이렇게 만 5년 동안 자연과 땅을 읽을 줄 모르고 ‘까막눈 농부’로 지내온 내가 올해 달라진 점은 나도 모르는 사이 ‘꽃씨도둑’이 됐다는 것이다. 어느 때보다 속 깊은 색을 가진 가을꽃들은 씨앗을 달고 고개를 떨구고 스스로 몸을 말려 언제라도 바람을 만나면 씨앗을 날려 보낼 준비를 하고 있다. 며칠 후면 그 또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매년 그 길을 다니고 매년 그 꽃들을 보았건만 이제야 씨앗들의 대탈주 비행모드를 눈치챈다.
지난봄 적지 않은 값을 치르고 화원에서 사 온 예쁜 씨앗봉지를 열어보고 허무함과 허탈을 느낀 터이다. 게다가 그나마 몇 알도 안 들어 있던 씨앗들은 싹도 틔우지 못한 불임 씨앗들이 반 이상이었다. 적지 않은 비용을 치르고서야 ‘까막눈 농부’의 눈에 비행준비를 하고 있는 꽃씨들이 얼마나 귀한 몸들인지 알게 된다. 가던 길 멈추고 이성과 체면도 간데없이 가을햇빛아래 ‘꽃씨도둑’이 되고 만다. 아직은 겨울에 심는 것이 좋을지 내년 봄에 심는 것이 좋을지도 알지 못하지만 햇살에 메마르고 거친 내 손이 먼저 바쁘다.
주말이면 아이들과 함께 ‘예술 교육’을 시작 한 시간도 5년이다. 처음 시작할 때 의기양양했던 태도와 심정도 좌절과 겸손으로 단련됐다. 결국 ‘교육’도 농사와 다를 바 없다. 긴 시간이 필요한 ‘사람 농사’이다. 환경에 적응하고 이식의 몸살과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그사이 아이들은 따뜻하고 살기 좋은 토양에서 스스로 빛을 내며 잘 자라고 있다.
2019년 봄부터 해남교육지원청과 함께 마을학교를 시작했다. 옥천초등학교와 함께 인성나눔 교육을 시도했다. 가을이 되고 돌아보니 오히려 아이들에게 배운 바가 많다. 어른들의 생각으로 아는 체하며 길안내를 했던 어른들에게 오히려 아이들은 천진하고 당당하게 자신들의 존재를 알려준다.
자연 앞에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대던 ‘까막눈 농부’가 해남읍 학동에 다채롭고 풍요로운 꽃으로 가득한 ‘수윤 동산’을 꿈꾸듯, 풍요로운 우리 아이들의 꿈으로 가득한 ‘아이들의 세상’을 꿈꾼다.
가을 갈무리를 마친 꽃씨들이 스스로를 지켜 낼 양분을 몸에 가지고 있듯이 우리 아이들도 각자의 꿈을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싹을 틔울 기름진 토양을 만나야 하듯 각자의 꿈을 준비하고 있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도 적당한 환경이 필요하다.
그동안 어른들의 생각과 오래된 지식의 인위적 환경에 아이들을 적응시키려 했던 태도를 내려놓고 아이들에게 눈길을 주어보자. 정작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적당한 햇빛과 시원한 나무그늘, 마음껏 뛰어놀 공간이 아니었을까 한다.
세계적인 대도시라는 서울보다도 더 넓은 땅을 가진 해남이다. 자연은 풍요롭고 도시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사람이 살기 좋은 환경을 가진 곳이다.
이곳에서 마저 아이들을 ‘지식교육’이라는 온실에 가두지 말고 스스로 마음껏 놀아볼 수 있는 조금은 거칠고 조금은 위험한 들과 숲에서 덥고 추운 시간을 보내고, 거친 모험을 통해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자신만의 꿈의 씨앗을 준비하는 환경을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떤가?
해남 마을교육의 희망, 옥천초등학교의 꿈을 함께 꾸고 시도해 보는 것은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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