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 방춘출신 김상훈씨 증언

▲ 계곡면 방춘 출신인 김상훈씨가 전쟁전후 민간인 희생자 해남군 합동 위령제에 참석해 69년간 가슴속에 묻어둔 집안의 아픔을 들려주고 있다.

 내 나이 5~6세, 작은오빠 16세. 총을 멘 경찰들이 마을로 들이닥쳤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동네 사람들을 집에서 끌어냈다. 아버지, 어머니, 큰오빠, 큰언니, 작은언니도 끌려갔다. 나는 할머니의 간청으로 동네 아짐의 손에 이끌려 산골짜기로 피신을 했다. 다시 돌아온 동네, 내 집도 동네도 불에 타 없어져 버렸다. 이때 친구들과 목포로 놀려갔던 작은 오빠도 돌아왔다. 그런데 다시 경찰이 들이닥치더니 작은오빠마저 끌고 갔다.
가족 모두가 끌려가자 할머니는 화병으로 돌아가셨다. 천애고아가 된 나는 영암군 군서면 고모댁에 맡겨졌다.
연좌제 굴레가 씌워진 오빠는 10년의 중형을 받고 목포형무소에 수감됐다. 오빠 나이 16세, 고문 때문에 갈비뼈가 무너져 늑막염을 얻었다.
먹지를 못하고 각혈이 심하다는 교도소 측의 연락에 고모부는 병보석으로 오빠를 데려왔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오빠. 누군가 번데기를 먹으면 병이 나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자 동네 이집 저집 다니며 아이도 업어주고 청소도 해주며 번데기를 얻어와 오빠에게 건넸다.
병보석 기간이 끝나자 오빠는 다시 교도소에 수감됐다. 그러나 다시 병이 심해 병보석으로 나왔는데 그때 오빠 나이 21세였다. 오빠는 나에게 꾸러미로 만든 공책에 연필로 그린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초상화를 보여줬다. 오빠가 교도소에서 그린 부모님의 초상화였고 오빠가 나에게 남긴 유일한 유품이었다.
1년 만에 보석으로 나온 오빠는 더 야위었고 기침도 더 자주 했다. 우리 남매는 서럽게 울며 잠이 들곤 했다. 어느 날 고모님 댁 어르신들이 우리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며 오빠의 반대에도 오빠를 결혼시켰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오빠와 새언니가 보이지 않았다. 고모님은 오빠가 기침이 도져 그만 세상을 떠났고 새언니는 친정으로 돌려보냈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는 오빠에 대해 묻지 말라고 엄하게 나무라셨다.
이후 나는 이모님 댁으로 거처를 옮겼다. 경찰들은 이모님 댁으로 찾아와 오빠가 어디 갔냐고 묻길 반복했다.
경찰이 이모집을 자주 찾자 이모의 시어르신들은 빨갱이 집안 아이를 거두어 불이익이 생길 것이라며 이모에게 짜증을 내곤 했다. 이모의 쩔쩔매는 모습에 나는 더 움츠러들고 주눅이 들었다. 그저 집안에서 이종사촌 언니와 오빠들의 책을 읽으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청소년 시기, 책가방과 운동화, 학용품, 예쁜 옷가지가 자주 배달돼 왔다. 나는 동화 속 키다리 아저씨를 생각했다.
중고등학교 졸업 후 직장생활 동안에도 경찰의 발길은 이어졌다. 직장생활도 어려웠다.
어느 날 이모는 너를 데리고 살면서 어려움이 많았다며 시집을 가서 편히 살라 했다. 나 때문에 고생한 이모에게 미안했고 더 이상 짐이 될 수 없어 결혼을 했다. 다행히 좋은 시댁식구를 만났고 남편은 친정에 대해 한마디 내색 없이 나를 품어줬다.
오빠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후 15~16년이 지난 어느 해 죽은 오빠가 불현듯 찾아왔다. 오빠 나이 37세. 오빠는 당시 교도소로 돌아가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란 생각에 몸을 숨겼고 가명으로 살며 화가의 길을 걷고 있었다. 나에게 온 소포는 오빠가 보내준 것이었다.
숨어 사는 동안 오빠는 신경쇠약에 걸려 정신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야 했지만 오빠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어린 동생을 돌봐주지 못한 마음이었단다.
오빠는 더 이상 숨어 살 수 없다는 생각에 해남경찰서에 가 자수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해남경찰서에서 공소시효가 끝나 대한민국 국민으로 사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며 말소된 주민등록을 다시 신청하라는 답변을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답변에 오빠는 나를 찾아왔다.
2개월 후 오빠에게 편지가 왔다. 신청한 주민등록은 나오지 않고 보안수사라며 3~4일에 한번씩 경찰서로 불려 다닌다는 내용이었다.
경찰서에선 사라진 15~16년간 누구를 만났고 무슨 일을 꾸몄는지를 반복해서 묻고 적고.
16살에 끌려가 경찰의 숱한 고문을 받았던 오빠에게 경찰서는 고통의 기억을 숱하게 불러내는 공간이었고, 그 고통이 반복될 수 있다는 두려움의 공간이었다. 매일 잠 못 자는 날이 늘고 있다는 오빠는 편지 말미에 내일 경찰서에서 또 보안취조를 받으러 오라 한다며 이제는 죽으면 죽었지 더 이상 경찰서에 갈 수 없다는 괴로운 심정을 전했다.
나는 답장을 썼다. 조금만 기다리면 나아질 것이기에 참고 견디라며, 답장을 보낸 그날 오후 오빠의 부고가 날아들었다. 
부모님과 큰오빠, 큰언니, 작은언니는 어릴 적 떠났기에 그 아픔을 온전히 안고 있질 못한다. 그러나 작은오빠의 삶과 죽음은 통한으로 자리 잡았다.
오빠 나이 16세, 이념도 사상도 좌도 우도 모르는 우리 오빠는 연좌제로 인해 죽음을 선택해야만 했던 것이다.
지난 6일 해남문화예술회관 다목적실에서 열린 전쟁전후 민간인 희생자 제8회 해남군 합동 위령제에서 김상훈씨는 자식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아픔, 다섯 살 때부터 시작된 그 아픔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외면하고자 했던 증언을 했다. 
김상훈씨 가족은 서울에서 살다 6·25가 일어나자 가족 모두 할머니가 살던 계곡면 방춘리로 피난 왔다 변을 당했다.
아버지는 김창수로 일본 유학을 다녀온 인텔리이자 독립운동가였고 당시 모든 지식인들이 추구했던 사회주의적 나라 건설을 꿈꾼 인물이다. 당숙인 김정수는 민선 해남초대군수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했고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 활동을 했던 해남 지도자 대부분은 일본 유학파이자 지주집안 출신의 자녀들이었다.
북평면 이진의 김홍배와 계곡 방춘 출신의 김창수, 김정수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특히 김창수와 김정수는 그 댁의 땅을 밟지 않으면 계곡면을 다닐 수 없다는 이야기 나왔을 만큼 대 지주집안이었다.

저작권자 © 해남우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