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석천(전교사)

 나는 아날로그 세대(世代)다. 시대에 뒤진 이야기 같지만 밤새 호롱불 아래에서 손편지를 써서 우체통에 집어넣고 회신이 오기를 일주일씩 기다렸던 회억은 아직도 촉촉하다.
아날로그 시대의 유산처럼 생각되던 우체통도 이제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대신 SMS, SNS, E-Mail, 카카오톡 등의 디지털 메커니즘(mechanism)이 그 자리를 빼앗아 버렸다.
하지만 버튼 한 번만 누르면 일을 수행하는 기계, 눈물을 흘릴 줄 모르는 기계와의 동거는 인간의 기계화 현상을 가속화 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감성마저 기계를 닮아 메마르고 퍼석퍼석해졌다. 온 가족이 ‘밥상머리’에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정담을 주고받는 시간은 줄어들고 생명 없는 기계가 중개하는 대화가 많아졌다.
「시간의 향기」(한병철 저)라는 책에 이런 글이 있다.
“사람들은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주체적 개입을 통해 시간을 단축시킨다. 컴퓨터, 인터넷, 디지털화, 이 모든 것이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한 지난(至難)한 싸움이다. 무엇을 얻기 위해 소요되는 시간은 줄어든 반면 시간의 값은 싸진다. 사람들은 예전보다 잘 늙지 않지만, 훨씬 더 빠르게 나이를 먹어버린다는 역설은 여기서 생겨난다.”
그것을 한병철님은 ‘향기 없는 시간’이라 했다.
오늘날 시간에는 여유와 리듬감이 없다. 우리가 먹는 과일조차도 유전자 조작이나 생장 촉진제를 통해 시간을 단축시킨다. 뭐든지 빠르게, 더 빠르게... 그래서 인간을 성급하게 만든다. 이른바 지름길 반응이다. 성공의 지름길, 행복의 지름길, 합격의 지름길, 취업의 지름길... 뭐든지 ‘가깝게’, ‘빨리’라는 지름길에 익숙해져 있다. 기다림이나 관조(觀照)하는 법을 잃어버렸다. 느긋이 기다리는 ‘발효의 시간’이 사라진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의 삶이 행복해졌을까?
가속화는 오히려 기존의 결핍 상태를 더욱 극명하게 부각시켰다. 삶은 더욱 분주해졌고 삶에 대한 방향 설정이 더욱 어려워졌다. 뿐만 아니라 빠른 것만을 추구하다 보니 오히려 시간에 쫓기고 메마르며 피로해졌다. 오늘날을 ‘피로사회’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시간의 피로를 느낀 인간들은 비로소 탈출을 시도하고 정관(靜觀)하는 삶, 인위(人爲)를 가하지 않은 무위(無爲)를 찾는다. 그것은 어쩌면 유전자 조작을 통해 시간을 단축하기 보다는 그것이 익어가는 시간을 되돌리려는 노력, 혹은 사색의 시간을 갖는 일일 것이다.
피로사회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몸부림일까?
요즘은 빠른 길 보다는 둘레길, 에움길, 엔길, 돌길, 돌림길, 두름길.. 이런 말들이 사랑받기 시작했다. 이른바 슬로우 시티(Slow City)움직임이다. 이웃 마을 청산도가 관심을 끌게 되었다든지 ‘나는 자연인이다’와 같은 TV 프로그램도 사색적 삶을 되살리려는 착상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지난해에 지리산 둘레길을 걸은 적이 있다. 자연이 그대로 살아있었다. 개구리가 뛰고 매미가 울고, 잠자리가 날개를 접고 쉬어갔다. 들풀은 시간을 재촉하지 않았다. 자동차를 타고 지나가면 하나의 점으로 보였던 것들이 둘레길에서는 생명을 찾고 본디의 모습으로 꿈틀거렸다. 둘레길을 걸으며 피로했던 시간이 헐렁해졌다.
피로사회의 메마름에서 벗어나 보고 싶은 것이 나만의 바람은 아닌 모양이다. 켈리그라피. 피오피(pop) 같은 동호회가 생겨나고 있고 LP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한다.
디지털 문화 속에서도 아날로그가 고개를 드는 것은 마치 북태평양 먼 바다로 나가 어른이 된 연어가 어릴 적 물 냄새를 기억하면서 2만 킬로미터나 되는 먼 여정을 헤엄쳐 돌아오게 하는 그리움이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런 그리움이 있는 것일 게다.
오스트리아 작가 페터 한트케는 이렇게 질문한다. ‘왜 사람들은 느림의 신을 한 번도 생각해 내지 않았을까?’
시간의 가속화를 붙들어 주는 어떤 중력도 없다.
오늘은 주변을 기웃거리며 그간의 지친 날개를 잠시 사색의 그늘에서 쉬어봄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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