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석 천(전 교사)

 
“어야, 으짠 일인가?”
“맬겁시 보고 싶어서 전화했네”
맬겁시 깨복쟁이 친구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전화를 했다.
건삽한 세상에서 별다른 용무가 있어서가 아니라 맬겁시 “뭐하신가?” 이렇게 마음 편하게 전화할 곳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약간은 촌스러운, 아니 촌스럽다기보다는 웅숭깊은 이 ‘맬겁시’라는 말은 나고 자란 고향의 말이다. 고향은 탯줄이 잘려진 땅이기에 고향의 말도 오롯이 그 자리를 지키며 탯줄의 흔적처럼 가슴에 남아있다.
그래서인지 나는 유난히 사투리(고향의 말)를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과거, 교직에 몸담고 있을 때에도 ‘선생님이 사투리를 많이 사용한다.’는 말을 듣기도 했었다.
표준어 규정의 제1장 제1항은 이렇다. “표준어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로 정함을 원칙으로 한다.”
이 원칙에 대해서는 유감이다. 서울말을 두루 쓰면 교양 있는 사람들이고 고향의 말을 쓰면 교양 없는 사람들이란 말인가? 모두가 서울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명재 시인은 “지역 말을 살리는 것은 한국 문화의 줏대를 세우는 일”이라고도 했다.
우리 고향의 말은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과 가장 자연스럽고 정확하게 소통할 수 있는 말이며 또한 지역 정체성의 표현수단이기도 하다.
규정이야 어찌 되었건 나에겐 고향의 말이 참 편하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배웠고 담배 연기가 자욱한 사랑방에 모여 노시던 어른들로부터 듣고 자랐던 말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머리 깊숙이 새겨져 있는 어떤 말들 중 하나가 ‘맬겁시’다.
그 말이 표준어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에 두지 않는다. 가슴 깊이 묻혀 있던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것을 어찌하랴!
고향의 말은 우리 문화와 조상의 숨결이 깃든 울타리이다. 고향의 말은 시간을 품고 있다. 고향의 산과 초가지붕에 걸친 박넝쿨과 밥 짓는 연기 모락거리는 정취가 들어 있다. 연(緣)의 끈으로 묶여 있는 그리운 얼굴들, 깨복쟁이 친구들이 들어있다.
최명희의 <혼불>에서는 ‘맬겁시’를 ‘매급시’라고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같은 전라도지만 저쪽에서는 ‘매급시’이고 이쪽에서는 ‘맬겁시’라고 써도 되는 유연함이 사투리의 맛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그쪽의 고향 말이니까. 어쨌거나 계산속 없이 투박한 ‘맬겁시’라는 말이 참 편하다.
맬겁시에서 느끼는 언어의 온도는 포근하다. 우리는 맬겁시 남의 집 담을 너머다 보고 맬겁시 전화를 하며 살지 않았던가.
맬겁시의 뉘앙스는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 끼리끼리만 이해되는 말이다. 타고난 탯줄이 맬겁시와 궁합이 맞는데 무슨 용무가 있어야만 전화를 할 수 있는 세상은 얼마나 각박한지,
나는 TV에서 ‘6시 내 고향’을 즐겨 본다.
교양미와 표준어로 단련된 진행자의 말보다 투박한 사투리를 사용하며 사람을 웃기는 여자 리포터의 말이 감칠맛 나고 정겹다. 들을수록 고향의 말이 재미있다,
달은 아직 그 달인데 세상은 너무 메마르다. ‘맬겁시’라는 말을 사랑하는 사람은 빼기 보태기에 능한 세상을 살아가기가 힘들고 허탈할 수밖에 없다.
시나브로 잊혀져 가는 ‘맬겁시’라는 말처럼 좋은 말도 드물 것 같다. 인간의 사귐도 어떤 목적이 있는 사귐보다는 맬겁시 보고 싶고, 맬겁시 전화를 주고받을 수 있고, 맬겁시 좋아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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