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권철(해남윤씨 중앙종친회장)

 100세 시대, 아름다운 노년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에 대해 가끔 생각한다.
생의 마감을 생각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장수시대 노년이 갖는 가장 큰 고민거리다.
물론 각자 살아온 삶의 여정에 따라 혹은 인생관이나 생명에 대한 태도에 따라 여러 종류의 해답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답에 대해 경청하거나 다양한 색이나 향이 묻어난 삶의 모습에서 지혜를 구할 수 있을 뿐이다. 인생은 똑 부러진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늙음을 추함의 동의어로 만들어 버린 젊은 세대가 갖는 미의식에 대한 편견과 소비능력이 있어야 만이 존엄하다는 자본주의 논리 또는 사회적으로 봉사활동의 뒤받침이 있어야 의미가 있다는 공공성의 이론 등에 대해선 나는 동의 할 수 없다.
이유는 노년이라는 생의 마지막 무대에서만큼은 자신이 추구하고 견지한 생의 여정과 리듬에 맞는 자유롭고 편한 삶이 진정으로 100세 시대의 아름다운 노년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조선 중기시대 도학자 여헌 장광현(1554~1637)의 「노인의 사업」과 「노령의 인사」라는 글에서 아름다운 노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헌은 당시로써는 83세라는 장수 인물로써 “배우는 자는 하루에는 모름지기 하루의 공부가 있어야 하고 일 년에는 모름지기 일 년의 공부가 있어야 하니, 하다말다 하는 것은 공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특히 「노인사업」에서는 노년이 갖는 특징을 살펴서 노년에 알맞은 일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즉 노년에 대해 탄식하거나 늙은 모습을 희화화하기보다는 노년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썼다. 그리고 「노령의 인사」에서는 늘그막의 아름다운 모습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하나: 언어를 그칠 것-마땅히 그칠 것은 외간의 일을 간섭함을 이르니, 만약 집안에서의 일상적인 말이라면 어찌 다 그칠 수 있겠는가. 
둘: 경영을 끊을 것-마땅히 끊어야 할 것은 세속에서의 잡된 일을 이르니 덕을 높이고 업을 넓히는 공부라면 어찌 끊을 수 있겠는가.
셋: 마음을 크게 비울 것-간사한 생각과 잡념을 일으켜서는 아니 됨을 말하는 것이니, 경을 주장하고 성을 생각하는 일까지 모두 정지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넷: 사시에 맡길 것-모름지기 방관하며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뜻이니, 만나는 환경에 따라 편안히 하는 도리가 있다는 말이다. 즉 몸이 변하면 삶도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듯 위 예문에서 보듯이 늙음에 대해 전혀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집중함으로써 젊어서 깨닫지 못했던 도에 이를 수 있는 시기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나저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인생은 거시기하고 머시기할 뿐이라는 생각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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