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준호(청년국악인)

 결혼 후 고향 집에 돌아오니 주변에 아저씨, 아주머니라고 불렀던 분들에게 ‘아들’이라는 호칭을 자주 들었다. 나를 보며 타지에 있는 자녀들의 모습을 떠올리는 듯했다. 그분들과 어울리다 보니 그분들의 바람이 자녀의 안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안녕은 그분들의 자녀가 취업을 하고 가정을 이룬 모습을 가까이서 자주 보는 것이었다. 더불어 지역에 자리를 잡고 사는 나도 잘살기를 바랐다. 잘 산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나는 기적 속에서 자랐다. 한 여인은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해서 사남매를 낳아 키웠다. 그런 도중 남편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며 홀로 자녀들을 헌신적으로 키우셨다. 그분이 내 어머니다. 국악 사남매의 꿈은 어머니의 헌신과 사랑으로 이뤄졌다. 이런 공로로 어머니는 정부에서 수여한 2016년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을 받았다. 상을 받을 때 어머니는 의외로 덤덤했다. 반면에 내 어머니의 삶을 아시는 지인들은 어머니를 향해 박수를 쳐주고 눈시울을 붉혔다. 나는 그때 어머니의 삶뿐만 아니라 동행하는 삶의 가치를 깨달았다. 기적이 눈에 보였다
어머니의 일기장을 봤다. 떨리는 마음으로 읽어 내려갔다. 여군 제대 후 해남에서 아버지와 만남과 사랑만 갖고 시작한 신혼, 자리를 잡기까지 부모님의 고생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태어나고 키우는 과정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나와 동생은 어머니의 젖을 함께 먹고, 어머니의 등에 함께 업혀 다녔다. 쌍둥이는 모든 것을 똑같이 해야 돼서 동생과 나는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신발을 신었다. 어머니는 5분 간격으로 두 번의 산고 끝에 우리를 낳았고 두 배의 육아를 감당해냈다. 이후 홀로 사남매를 키운 어머니는 여성동아 잡지에 “이대로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때의 심정을 담은 인터뷰를 했다.
요즘 어머니는 하모니카, 피아노 등의 악기에 푹 빠져 있다. 옛날에는 사남매를 키우는 기적으로 삶을 악착같이 버티었다면, 최근에 어머니는 정답게 사는 사남매를 보며 삶을 단단하게 누리고 계셨다. 어머니의 삶을 비춰 보건데, 어머니는 힘든 시절부터 나름의 기적 같은 노래를 낮은 음조로 부르고 있으셨던 것은 아닐까. 지금의 삶을 상상하며 말이다. 
지난 8일, 나와 동생,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하는 특별한 세 사람의 생일잔치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어머니는 “하모니카를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갑작스런 말씀에 우리 사남매는 깜짝 놀랐다. 새로운 꿈이 생긴 것이다. 어머니는 바라는 것들을 쉽게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 사실 말씀할 겨를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라는 이름에 가려져 버려야 했던 것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래도 괜찮다.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가 나를 키웠고, 내 자녀의 뼈와 살이 됐다. 이제는 어머니의 꿈을 응원하고 싶다.  
어머니는 헌신이어도 그것이 헌신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대신에 내가 삶에 버거워 힘겨운 기색을 보이면 그저 너무 애쓰지 마라고만 말씀하시고 나를 다독이셨다. 어쩌면 그것은 주변의 아저씨, 아주머니들의 모습이기도 했다. 자녀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 새해 특별한 것을 바라지 않고, 자녀들의 삶이 평온하게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조금 욕심이 있다면 자녀들이 웃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는 것이지 않을까. 나는 이분들의 모습을 봤기에, 올해에는 이분들과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청년들의 삶에 관하여 소통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어렵더라도, 세상에는 평범한 기적이라도 있는 것이니까. 때문에 나는 기적을 바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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