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 욱 하(수필가, 재경향우)

 선물은 대체적으로 특별한 사연이나 기쁨을 간직하고 있다.
지난해 봄 작은 며느리한테서 생일 선물로 구두 한 켤레를 받았다.
그런데 그 구두 상자가 일 년이 가까워지는 지금도 신발장 맨 위에 그대로 있다. 그럼에도 오늘 아침에 뒷굽이 많이 닳아 좌우 균형을 잃은 헌 구두를 신고 외출하는 내게 아내는 웬 청승이냐고 면박을 준다.
그 불만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내가 새 구두를 아끼는 이유는 유년 시절의 신발에 깃든 추억 때문이다. 더구나 이번 며느리의 구두 선물에는 별난 사연까지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내 백화점 주변의 대로변에는 구두 수선 부스가 있다.
낡은 구두의 밑창을 교환해주거나 윤이 나게 닦아주기도 하지만 구두 티켓을 20% 할인해 주기도 한다. 이 티켓을 사 두었다가 백화점 세일 기간 중에 정가의 20%를 또 할인받아 샀다는 며느리의 자초지종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두가 갖는 의미는 남녀 간에 차이가 조금 있다.
대체적으로 남자에게 구두는 신발 역할 뿐이지만 여자에게는 악세사리 기능이 크다. 입는 옷은 물론 날씨와 만나는 상대방에 따라 다른 신발을 신기도 한다.
내 유년시절은 해방 후 맞은 6·25전쟁의 참화로 의식주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었던 비참한 시절이었다.  그렇지만 그 어려울 때에도 설이나 추석 명절만큼은 온 국민의 로망이었다.
어른은 제사 음식과 자식들 선물 준비에 걱정이 많았지만 아이들은 새 옷이나 새 신발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백화점이나 마트에서 일괄 구입은 꿈도 꾸지 못했다.
어머니는 가장 먼저 옷이나 신발을 사고 다음에는 마른 생선이나 과일을 샀다. 쇠고기나 돼지고기는 보관하기가 여의치 않아 명절 하루 전 대목 장날에 사거나 마을 사람들이 추렴을 했다
특히 추석 때는 햅쌀을 얻기 위해 제대로 익지도 않은 나락을 베어 찐 후 말려서 쌀을 만들었다.  이 쌀을 ‘찐쌀’ 혹은 ‘올벼쌀’이라고 불렀다.
어머니가 사다 선반 위에 올려놓은 옷이나 고무신, 운동화는 바라만 보거나 가끔은 머리맡에 나란히 놓고 잠을 자기도 했다.  누가 시키거나 강요하지 않았지만 기분 좋은 설과 추석날 아침을 위해 기다렸다. 마치 며느리가 사다 준 신발장 위의 구두상자를 바라보면서 행복을 느끼는 요즘처럼 그때가 내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너무 풍족해 간절한 소망 가운데서 얻는 기쁨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목마름이 큰 사람일수록 냉수 한 컵의 충만감을 만끽할 수 있듯이 오랜 기다림 끝에 맞이하는 설이나 추석날 아침은 정말 행복했다.
새 옷에 새 신발을 신고 집안 어른들께 세배하고 성묘하던 그 시절의 행복을 요즘 아이들이 알기나 할까?
행복은 기다림이란 말이 특히 마음에 와 닿는 요즘이다.
 

저작권자 © 해남우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