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성 훈(청년 작가)

 유치원, 초·중·고 개학이 또 연기됐다. 9일 예정이었던 개학날짜가 23일로 2주 미뤄졌다. 
유은혜 교육부장관은 개학을 예년보다 3주 미룬 이유에 대해 “코로나19 증가세가 꺾이는데 지금부터 2주 동안이 중요하며, 학생이 안전하게 학습할 수 있는 환경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최소 1주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 뉴스보다 하루 앞선 지난 1일, 동아일보는 “학교 비축 마스크 일부 수거 논란…교육부 개학 후 다시 보충” 기사를 썼다. 정부는 초중고교들이 비축해 둔 마스크 중 일부를 수거해 일반 시민들에게 우선 보급하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마스크 보급과 학교 개학 연기의 인과성을 논하기는 어렵다. 근본 문제는 ‘코로나19의 슈퍼 확산’에 있다는 데 본질을 흐리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서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마스크 대란’, ‘개학 연기’라는 언어 심해에 깔려 있는 불만, 두려움, 공포, 불신, 증오, 혐오, 분노 등의 감정을 어떻게 해석할까 하는 것이다. 
시일이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코로나19 종료’를 선언하는 날은 분명히 올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염원하고 기대할 날일 것이다. 막상, 그날이 오면,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을 살아가겠지만, 과연, 이성복 시인의 <그날>에 나오는 시구처럼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한 지인의 말을 빌려본다. “서울에서 사람들이 만나면, 뭐부터 하는 줄 알아? 안녕이라는 인사 대신에 서로의 신분을 확인하는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건, 바로 신천지 교주인 이만희를 욕하는 것에서부터야. 같이 험담을 하면, 오케이 착석! 뭔가 망설이거나 머뭇거리면, 그대로 바이 하는 거지.” 이를테면 서로 간 관계 맺기 징표가 ‘이만희에 관한 험담’인 것이다. 
신천지 대 비 신천지, 기독교인 대 비 기독교인, 코로나19 확진자 대 비 확진자…. 사는 게 힘에 부칠수록 우리는 더욱더 빠르게 흑백논리 수렁에 빠진다. 
모든 것을 통합해 우리 좋게 지내자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해결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우리 삶을 ‘진화’하는 것에 반대할 이유 따윈 없다. 
여기에서 나는 신천지를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비신천지라고 말하며 험담하는 대화적 분위기에 섞이고 싶지도 않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 우리 사회는, 사람 간 감정이 극으로 치달으며, 그 바탕에 적대감을 깔고 있다는데 문제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마치 누군가 불만 놓지 않았지 기름이 흥건히 땅에 고여 있는 꼴이다. 그 불쏘시개는 누가 들고 있을까. 
역사 속, 혐오와 배척의 말, 이성보다는 광기에 집착한 말, 적을 두어야만 자신이 생존할 수 있다고 믿는 말, 개인보다는 집단을 위시하는 말. 그것이 마치 멋진 신세계를 지향할 듯 청사진을 그릴 수 있다고 감언이설 한 사람이 있다. 바로 히틀러다.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 기원>에서 사회적 아노미, 정치적 불안 등의 현상에서, 전체주의는 운동의 이름으로 인간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축소하고 파괴했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공간이란 물리적·정신적인 것을 아우르는 말이다. 가짜 뉴스에 휘둘리고, 낭설에 불안을 확산하는 것, 편을 나누고 서로 적대시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 등. 어쩌면 이러한 것들이 우리 스스로의 삶을 깎고 전체주의로 회귀하는 자양분이 되지 않을까. 
코로나19로 정신적으로 힘들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다. 미국의 만화가 빌 워터슨은 고통은 귀를 닫은 세상을 깨우는 신의 메가폰이라는 말을 했다. 
무사안일이라 믿었던 것들에 균열이 가고 지금 세상은 ‘마스크’라는 하나의 상징을 우리 눈으로 보고 있다. 
고통이 쓰라린 것은 매한가지. ‘코로나19 종료’라는 그날을 머릿속에 떠올린다면, 우리 조금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우리가 고통 속에 봐야 할 것, 들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저작권자 © 해남우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