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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여 비가 오지 않을까 기대 반 설렘 반 꼭 늦바람 난 사내처럼 마음이 달뜬다.
풀과 나무에 한창 물이 올라 푸르른 녹우당(綠雨堂) 뜰에는 아직 시들지 않은 철쭉이 붉다.
‘산기슭 비자나무에 한바탕 바람이 몰아치면 우수수 봄비 내리는 소리처럼 들린다’하여 고택의 당호를 녹우당(綠雨堂)이라고 했다지만, 초여름의 정원은 고즈넉하다. 어떻게 알았는지 ’정원의 오후‘에는 삼삼오오 모여 든 사람들로 늘 붐빈다.
자연과 함께하는 선비의 풍류를 느끼고자 왔는지, 아니면 태초의 음향 같은 자연의 소리가 그리워 왔는지. 마루와 들에 앉은 사람들은 다소곳하다. 그러나 이곳에선 마음을 열지 않으면 소리도 없다. 다만 오래된 책에서 문자의 향기가 나듯 고택에서는 이 집에서 살았던 선인들의 체취가 풍긴다. 툇마루와 문설주는 물론 문지방과 문고리, 정원에 놓인 돌멩이 하나에서도 이곳을 거쳐 간 이들의 취향을 엿볼 수 있다.
녹우당에서는 6월 한 달 동안 주말마다 국립남도국악원에서 마련한 “정원의 오후- 뜨락에서 자연을 듣다” 라는 공연이 펼쳐진다. 물론 조명도 마이크도 없는 ‘언플러그(unplug)’ 공연이다. 악기와 자연의 소리만 들을 수 있다.
공연은 주로 고즈넉한 전통의 공간과 어울리도록 소규모 독주로 진행된다. 거문고산조, 가야금산조, 대금산조, 그리고 판소리 등 자연과 호흡할 수 있는 곡들로 이루어졌다. 우리 음악을 통해 선비문화와 선비정신을 찾고 경박해진 오늘의 문화를 돌아보게 한다는 것이 기획 의도란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되돌아간 듯 옛날 복장을 하고 연주하는 악사들을 보고 있는 동안엔 질주하듯 살아온 일상이 까마득하다. 때론 바람소리와 때론 빗소리와 어우러진 국악의 향기가 자연이 되어 날것으로 녹우당의 뜰에 가득하다.
툇마루에 앉아 연주하는 악사의 숨소리와 뜰에 앉은 관객의 호흡이 섞이고 뒤란 대숲에서 부는 바람소리와 대금소리가 섞인다. 거문고 소리와 장구소리가 섞이고 가야금 소리와 지붕 위의 새소리가 섞이면서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고 안과 밖이 하나가 되는 아름다운 공간을 창출한다.
야외이지만 야외가 아닌 고택의 음향은 잔잔한 강물처럼 가슴으로 스며든다. 나무들의 울림이 우리 악기와 같이 어우러져 소리가 증폭될 때 아주 아름답게 증폭되어 은은하고 깊은 소리를 자아낸다.
대금 소리는 대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와도 같고, 가야금 소리는 연못위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수련 같다.
거문고 소리는 술대를 쥔 손과 현이 만나 검은 학이 비상(飛上)하며 뛰노는 소리를 짓는다. 그 중에서도 특히 고택에서 듣는 거문고 소리는 문외한인 나의 심금을 울린다. 나는 비로소 거문고의 매력에 푹 빠졌다. 이 집에서 고산 선생이 직접 거문고를 만들고 탔다고 하니 감회가 더욱 새롭다.
거문고는 명주실로 만든 6개의 줄을 술대라는 나무 막대기로 치거나 올려 뜯어서 소리를 낸다. 술대는 바닷가에서 자라 단단한 대나무인 해죽(海竹)으로 만든다. 그래서 일까. 거문고에서는 먼 바다의 파도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여성적인 느낌을 주는 가야금에 비하여 폭넓고 웅장한 음색을 가진 거문고는 예로부터 남성들의 사랑을 받아 왔으며 옛 선비들은 인격 수양의 근본으로 삼았다고 한다. 녹우당을 나서는데 진양조에서 휘모리까지 내달리는 거문고 산조가 내 마음을 죄었다가 풀었다 한다. 거문고 소리는 마음으로 듣는 소리이다. 거문고 소리가 씻는 것은 우리의 귀만이 아니다. 일상 속에서 기계음과 거짓소리에 시달린 우리의 마음이기도 하다.
김경윤(시인·해남고 교사)
해남우리신문
wonmok76@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