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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면 성산리 한드리 들판에는 말(큰)무덤들이 있습니다. 원래는 6기가 있었다고 하나 3기는 개답공사 때 없어지고 3기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말무덤을 언제부터인가 만의총(萬義塚)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한국지명총람(1984)과 문화유적(1986)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1980년대 후반에 등장한 듯합니다.
해남군사(海南郡史,1995)에 나오는 만의총 기록은 전거를 밝히지 않아 어디에서 따왔는지 알 수 없지만,
한편의 무협소설 같은 무용담으로 전합니다. “명량해전에 대패한 소서행장(왜장) 부대가 해남에 대한 보복전을 감행하였다. 1597년 10월 10일 옥천 한드리 들판에서 윤윤, 윤구 형제 등 만여 명의 의병은 왜구와 혈전을 벌였다. 윤구 형제는 격전 중 칼이 부러지자 바위틈의 구렁이를 들고 종횡무진 후려쳤다. 이상하게도 구렁이가 스치기만 해도 적은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이 치열한 전투가 끝나고 만여 구의 시신을 거두어 합장한 것이 말무덤 즉 만의총이다.” 이런 말무덤은 1990년에 정유재란 유적지 즉 만의총으로 새롭게 단장하고, 매년 10월 10일 군비를 지원받아 제사를 모셔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2008년 만의총 3호분에 이어서 1호분이 발굴조사 되자, 만의총이라는 인식을 뒤집을 새로운 세 가지가 밝혀졌습니다.
첫째, 고분은 도굴당하지 않은 것이 거의 없는데, 1호분만은 처녀분이었습니다. 이는 옥천 한드리 전투와 관련된 무덤이라는 믿음으로 일부 사람들이 보살핀 결과라고 합니다.
둘째, 정유재란 관련 만의총이 아니라 삼국시대 고분들로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1호분의 경우, 상층 부식토층(두께 20~60㎝)에서 인(燐)이 하층 보다 조금 더 나와 정유재란 토층이라는 설은 그대로 믿기가 어렵습니다. 인은 식물에서도 나오기 때문에 부식층에서 조금 더 나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또 부식토층에서 인 이외의 증거, 예컨대 유골, 옷가지 등 전혀 시신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고, 만여 명을 말무덤 위에다 묻었다는 토층 자체가 매우 얇다는 점, 게다가 3호분에는 아예 부식층도 없는 점 때문입니다. 셋째, 1호 석곽분에서 쏟아진 유물들의 성격은 서기 500년 전후의 것으로 가야계, 신라계, 백제계 심지어 왜(일본)계를 망라했습니다. 청동거울, 조개팔찌, 금장식 청동곡옥, 토기류, 큰 칼 등 무기류, 옥 1100 여점 등 찬란했습니다. 그 중 토우 달린 신라계 서수(상서로운 동물)형 토기는 보물로 지정돼 있는 경주 미추왕릉 출토품과 흡사했고, 청동거울과 조개팔찌는 왜계유물 이었습니다.
근거 없는 이야기와 역사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신빙성 없는 이야기가 그럴듯하게 꾸며져 종종 역사자원화 되기도 합니다.
예컨대 전남의 홍길동, 왕인, 심청과 해남의 수성송, 어란 여인 등이 그것입니다. 이중 군청 앞 멋드러진 수성송(천연기념물 430호)은 1555년 달량진 사변 때, 왜구로부터 현감 변협이 해남읍성을 지켜낸 후, 그 기념으로 심었다고 하는데, 근거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럴싸한 유래는 1980년대 모인의 창작설이라는 의혹이 있으며, 원래 이름도 무고송(撫孤松)으로 다릅니다. 샘플공을 뚫어 나이테를 보면 간단히 알 수 있습니다. 수령이 500년 이상으로 확인돼 제 2의 만의총식 쇼크가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무엇이 역사의 진실인지 속 시원히 밝혀지길 기대합니다.
해남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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