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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도 울고 넘는 울고 넘는 저 산 아래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었건만” 원로가수 윤준식(84·예명 윤설봉) 옹은 늘 음악과 함께 살아간다. 해남읍 연동에서 고산유적지매점을 운영하고 있는 그는 60년대 자신이 취입한 곡들을 들으면 나이를 먹어가는 것도 잊어버린단다. 노래를 들을 때마다 젊은 시절로 돌아가기 때문에 하루 종일 흘러나오는 노래는 그에게 늙을 틈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그의 외모는 70대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고산의 14대 직손으로 태어난 윤준식 옹은 1945년 현 광주일고 전신인 명문 광주서중(21회)을 졸업하고, 성균관대에서 클래식을 전공했다. 당시 그는 현제명 및 홍난파와 더불어 한국현대음악의 중시조로 일컬어지던 안기영으로부터 현대음악을 사사 받았다.
클래식을 공부했던 그가 대중가요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동백아가씨’의 작곡가인 백영호 를 만나면서이다. 1952년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란을 갔던 그는 부산에서 잠시 정착을 하게 되는데,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하게 되면서 부산시청에 근무하게 된다. 그러던 57년에 부산 서대신동에서 전국레코드가수 선발 콩쿨대회에 참가하게 된다. 등수 없이 5명을 선발하는 콩쿨대회에서 뛰어난 가창력을 인정받은 그는 당당히 입선했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백영호의 눈에 띈 그는 이후 가수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작곡가 여야성으로부터 ‘허무한 청춘’ 등을 받아 20여곡을 취입하게 된다. 부산시청 근무 당시에는 부산방송국에 출연해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64년 국민은행 전신인 한국무진 순천지점에 근무할 당시에는 광주방송국에 출연해 애수어린 그의 목소리가 전파를 타기도 했다. 60대 이상이라면 당시 예명 윤설봉으로 활동했던 그를 기억하고 있다.
67세 되던 해 서울의 삼미상사(석유회사)에서 정년퇴임을 한 그는 낙향해 지금은 소일거리로 고산유적지매점을 운영하고 있다.
그의 거실로 들어서자 노래방기기와 최신 음향시설이 갖춰져 있다. 거실에 들어선 그는 자신의 애창곡인 ‘외나무다리’(최무룡 노래)를 고른다. 그의 목소리는 원로가수인 남인수의 목소리와 흡사한 미성인데, 노래를 부를 때는 아직도 젊은 시절의 목소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귀로만 들으면 20대 목소리로 착각할 정도이다.
매점에 들르는 관광객들도 원로가수라는 사실을 알고는 그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한참동안 듣고 가기도 한다. 간혹 관광객들을 거실로 초청해 노래를 불러주기도 하는데, 관광객들은 그의 노래에 빠져 재창 삼창까지 외치기도 한단다.
40년대 후반 삼산초에서 잠시 음악교사를 하기도 했던 그는, 가야금에도 조예가 깊었던 고산의 예인 기질을 물려받았다. 음악과 함께하는 그의 삶은 오늘도 생기가 넘친다.
박태정 기자/
해남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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