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에게 쫓기던 장발장은 도망칠 데가 없었다. 막다른 골목에서 그는 수녀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깜짝 놀란 수녀는 그가 개에게 쫓기는 토끼라는 것을 알고 용감하게 그리고 천연스럽게 그런 사람을 본 일이 없다고 형사에게 대답했다. 일평생 거짓말을 해본 일이 없는 수녀가 거짓말을 했다. 수녀가 거짓말을 할 때 수녀는 창녀가 될까? 아니다. 도리어 성녀(聖女)가 된다. 수녀의 정직이 깨질 때 그것이 부정직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직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게 된다. 현상을 깨뜨리고 성녀가 나타나기 위하여 거짓이라는 가상이 끼어든 것뿐이다. 이런 거짓은 거짓이 아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한 사랑의 방편이다.
절기상 얼었던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우수(雨水)이다. 겨우내 얼었던 몸과 마음이 봄눈 녹듯 풀리게 하는 데는 문학작품이 주는 감동도 한 몫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래서 유명한 ‘장발장’(원제 레미제라블)의 한 대목을 문득 떠올려보았다. 프랑스 낭만파 최대의 문호 ‘빅토르 위고’가 1862년에 발표한 장편 사회소설 ‘레미제라블’은 당시의 프랑스 사회상이 잘 반영된 작품이다. 주인공 ‘장발장’의 불우한 일생을 중심으로 사회의 가혹한 박해 밑에서 인생을 저주하던 영혼이 깨끗한 사랑으로 인해 다시 살아나는 과정을 그려냈다. 소설은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의 감옥살이를 한 죄수 장발장을 중심으로 사회에서 소외된 하층민들, 즉 농부, 노동자, 공장직공, 매춘부, 거지들의 절망적 삶을 다루고 있다. 빵 한 조각 훔친 죄로 시작된 감옥살이가 19년이나 지속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회가 모든 사람들에게 불행하고 가혹한 시절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930년대 초반 미국에 불어닥친 경제 공황으로 실직자들이 거리에 넘쳐났다. 빵 한 조각을 훔친 노인이 재판정에 끌려왔다. 당시 라과디아 판사는 이 노인에게 벌금 10달러를 부과했다. 그리고 자기 호주머니에서 10달러를 꺼내 노인에게 건네주면서 “당신이 거리에서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을 때 나는 음식을 많이 먹고 산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벌금은 제가 대신 내겠습니다.” 그리고 방청석을 향해서 “이 노인이 밖에 나가면 또 빵을 훔칠 수도 있습니다. 배부르게 먹은 것의 대가로 누구든지 조금씩만 기부해주시기 바랍니다.” 즉석에서 모자가 방청석에 돌려졌다. 47달러가 모아졌다. 이 노인은 57달러를 들고 재판정을 빠져나갔다. 라과디아 판사는 후일에 뉴욕 지사가 되었고, 허드슨 강변에 위치한 라과디아 공항은 그를 기려 지어진 공항이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그가 말년에 쓴 동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답으로 ‘사랑’을 이야기했다. 돈과 권력과 1등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는 세상에 ‘사랑’이라니, 말도 안 돼! 로마 압제로부터의 해방과 먹고 살아갈 빵과 천지개벽을 기대한 이스라엘 군중에게 ‘사랑과 용서’를 설교한 예수는 결국 용도폐기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는가, 라고 냉소하는 사람들이 많다. 최근 지구촌 곳곳에서 자연재해, 기후변화 등을 바라보며 지구의 종말이 임박했는가, 하고 조바심 내는 사람들도 많다. 문제는 지구의 종말이 아니라 인간 상실과 인간성 파괴에 있다. 인간이 상실되었다면 지구 종말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주 먼 훗날 신께서 가라사대 “지구 종말 전에 인간 상실이 있었다.”고 탄식하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사람은 뭐니 뭐니 해도 결국 사랑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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