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연한 봄이 햇살 가득 치렁치렁 매달려 거리를 쓸고 다닌다. 따뜻한 기운이 지나간 자리마다 떡잎이 봉긋이 피어나 옹알이를 시작했다. 변하지 않는 생의 시작을 바라보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라틴어 ‘granum’[그라눔]은 씨, 낱알을 나타낸다. 보기에 작은 이것이 어떻게 영어 표현인 ‘grand’[그랜드]로 확장할 수 있었을까. 웅장함이란 큰 것도 작은 것에서 출발한다는 사고가 반영된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들 나라에 많은 가벼운 것들이 하나의 큰 덩어리를 만든다는 관용어구를 사용하는 것은 아닐까. 마치 우리나라 속담의 티끌 모아 태산처럼 말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혜를 관통하는 민중의 앎은 엇비슷해 보인다.
코로나19로 짐짓 미뤄졌던 학교가 랜선을 활용해 개학했다. 미래의 씨앗을 파종하는 작업이 예년보다 늦었지만 시작됐다. 인터넷 연결, PC 설정, 출결 확인, 실시간 수업, 코로나19 관련 공문 확인 등 학교 현장은 예전에도 없었던 새로운 시도를 모색하고 적용하느라 분주했다.
모두가 처음이라, 학생도 선생님도 약간의 혼란은 경험한다. “선생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클래스에 입장할 때 카메라와 마이크 허용은 했니?” 등. 과거에 머문 한 사람이 마치 우주여행 중 길을 잃어 시·공간을 뚫고 미래로 온 것 같다. 코로나19 이전과 이후, 우리의 삶에는 많은 부분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미래학자의 말을 실감했다.
앞으로 어떤 사람을 육성할 것인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아무도 모르는 것, 정확한 답을 제시할 수 없는 미래 세대가 지금의 아이들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공부’라는 것, ‘교육’이라는 것에 대해 기성세대가 접근할 수 있는 코드는 무엇일까. 기술이 변화되고, 시대적 가치가 빠르게 바뀌는데, 기존의 것만 고수하는 방식이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마냥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4차 혁명’의 꽁무니를 쫓으며 바쁘게 말하는 것도 공허하다.
일부 교육학자는 교육이라는 용어인 Education[에듀케이션]이 E[에] + ducare[듀케르]에서 나왔으며, 이는 밖으로 꺼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달리 말하면, 무엇을 주입하는 것이 아닌, 개별의 잠재성을 발현할 기회를 주는 것이 교육이라는 것이다. 아이들의 개별성에 어떻게 접근해 맞는 신발을 찾게 할 것인가.
지역공동체, 마을과 학교를 잇는다는 개념인 ‘마을학교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가 물 밑에서 나오고 있다. 지난해 실시했던 마을학교 시범 교육에 대한 반성과 함께였다. 뜻하지 않게 코로나19로 인해 개학이 늦어졌지만, 머뭇거리면서 ‘언젠가’ 정상화될 교육 현장에서 ‘지역과 학생이 만나야 하고, 학생은 교과공부를 포함해 배움을 확장할 기회를 마련해야 하고, 당연히 지역사회도 준비해야 하고’라는 이야기가 요체였다. 대면접촉이 시작되지 않는 시점이고, 막상 학교 수업의 정상화가 이뤄진다고 해도 코로나19가 종식될 때까지는 매우 조심스러운 사안이라 유념해야 하겠지만 대화의 물꼬는 조금씩 터졌다.
멀리 가는 걸음도 한 걸음이 시작이다. 어쩌면 ‘배운다’라는 말속에 우리는 너무 많은 함의를 상상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아이들의 잠재능력을 찾아 빼기 전에, 주형틀에 맞춰둔 지식 유산을 강제로 집어넣으려 했던 것은 아닐까. 한 걸음이 아닌 열배, 백배의 속도로 뛰게 했던 것은 아닐까. 아이들이 지역을 모른다는 것은 기성 어른의 상상적 담화이지 않을까.
정작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대상인 아이들을 어른들은 알고 있는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이 궁금한지, 어떤 고민이 있는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요컨대 이것도 가르치고, 저것도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닌, 우리 지역 어른들의 삶과 교우할 수 있는 창 하나 띄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 속에서 아이들에게 좀 더 말할 기회를 양보하는 것은 어떨까. 그 말이라는 게 굳이 언어일 필요는 없다. 아이들과 기성세대 간에 관찰이라는 행위가 필요할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