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입적하신 법정스님 생가를 복원하자는 의견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문내면 선두리 생가에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이미 타인의 소유가 돼 버린 법정스님 생가는 지금은 옛 모습이 사라져 버렸지만 선두리 마을에서 가장 좋은 터로 꼽히고 있다.
이곳 생가에서 법정스님과 생활했다는 임태중(74·문내 우수영)씨는 집터가 바다 선창가와 가까이 있어 교통중심지인데다 양지바른 곳이어서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로 붐빈다고 말한다. 지난 14일 법정스님 생가를 찾았을 때도 마실 나온 노인들이 이 집 앞에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노인들은 선창가로 나가는 사람들도 구경하고 겨울철에도 볕이 잘 들기 때문에 이곳에서 주로 논다고 말했다.
법정스님이 태어난 집은 초가삼간이었다. 초가삼간 앞에는 작은아버지가 운영하던 여객선 매표소가 자리했다. 작은 초가삼간에서는 법정스님과 할머니, 어머니, 작은아버지 가족이 함께 생활했다. 법정스님이 태어난 초가삼간은 현재 꽃밭으로 변했고 여객선 매표소는 슬라브 집으로 변해 타인의 소유가 된지 오래다.
법정스님은 선두리 바닷가 초가삼간에서 1932년 2월 15일 박근배씨와 김인섭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박재철(朴在喆), 출가 후 법정이라는 법명을 얻었다.
외아들이었던 법정스님은 2~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작은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자란다. 우수영초 25회 졸업생이었던 법정스님은 6년제였던 목포상업중학교에 진학한다. 이후 교육제도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분리되면서 자연스럽게 목포상고에 진학하게 된 법정스님은 전남대 상대에 진학해 3년을 수료한다. 법정스님은 목포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주말이면 고향인 선두마을에 내려와 매표소 일을 돕고 여객선으로 손님을 실어 나르는 종선의 노를 저으며 작은아버지 일을 도왔다고 한다.
법정스님이 목포로 진학하자 작은아버지는 모자를 위해 목포 대성동에 초가삼간을 마련해 준다. 이곳에서 법정스님 어머니는 하숙을 치게 되는데 하숙생은 주로 목포로 진학해온 우수영 출신 학생들이었다.
당시 목포고등학교를 다녔던 이희재(75·선두리)씨는 이 집에서 3년간 하숙을 하며 법정스님과 한 방에서 지냈다고 한다. 4년 선배였던 법정스님은 당시 목포에 자리했던 전대 상대에 재학 중이었는데 한마디로 책을 너무 좋아했다고 한다. 가정 형편이 너무 어려웠는데도 어떻게 그 많은 책을 구했는지 방안은 온통 책뿐이었고 책 권수가 대략 2000여권은 되었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같은 방을 쓰는 후배들에게도 항상 책 읽기를 권해 이때 이씨도 책을 가까이 하게 됐는데, 당시 법정스님이 가장 좋아했던 인물은 소설가 이광수였다고 한다. 책밖에 없는 방에는 이광수 사진이 놓여있었고 이광수가 쓴 책은 죄다 구해다 읽었다는 것이다. 법정스님은 책을 읽으면서도 유익한 내용은 죄다 메모장에 기록했는데 그 메모장만 해도 수십여 권에 달했다고 하며 굉장히 속필인데다 명필이었다고 이씨는 회상했다. 작은 방에서 남자 셋이 생활했고 방안 가득 책과 메모장이 가득 찼는데도 방에는 먼지 하나 없을 정도로 법정스님은 청결했고 후배들도 늘 깨끗함을 유지해야 했다고 한다.
어느 날엔가 법정스님과 친한 흑산도 친구가 희귀한 새들을 잡아와 법정스님에게 선물했다고 한다. 고맙다고 선물을 받은 법정스님은 친구가 떠난 다음날 귀한 새들을 모두 날려 보냈다며, 그때부터 스님이 일상 사람들과 다름을 느꼈다고 이씨는 말했다. 또 법정스님은 출가하기 전 산에서 향나무를 베어와 밤새 내내 칼로 깎아 향을 만들어 피워 방안에는 항상 향냄새가 가득했고 목포 유달산에 있던 사찰에서 며칠씩 묵고 오곤 했다고 했다. 이후 이씨는 목포를 떠났는데 법정스님이 유달산에 있던 사찰에 출가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곳에 찾아갔던 적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출가 후 법정스님은 가끔 고향인 우수영에 찾아왔는데 마을에는 들르지 않고 친한 벗이었던 충무고등공민학교(우수영초 전신) 김옥남 교장을 조용히 만난 후 떠났다고 한다.
자신이 창건한 서울 성북2동 길상사에서 열반한 법정스님은 1954년 2월 15일 통영 미래사에서 당대의 고승인 효봉을 은사로 출가했다. 1973년 대한불교 조계종 기관지인 불교신문사 논설위원, 주필을 맡으며 함석헌, 장준하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 유신철폐 개헌 서명운동에 참여했고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으로 참여한다.
그러나 인혁당 사건으로 8명의 민주화 운동을 하던 젊은이들이 사형당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아 송광사 뒷산 중턱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수행한다.
이후 법정스님은 사)시민모임인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본부를 창립하고 97년 이사장에 취임한다. 98년 종교의 벽을 넘어 명동성당 축석 100돌 기념초청강연을 했고 2003년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인 길상사 회주에서 물러난 후 무소유의 삶을 살다 2010년 3월 11일 길상사에서 법랍 55세, 세수 78세로 입적한다.
법정스님은 입적하시기 하루 전날 찾아간 미황사 금강스님이“스님 고향에는 동백꽃이 만발했고 매화도 꽃망울을 터트렸습니다. 스님도 빨리 쾌차하셔야죠”했더니 눈물만 흘리셨다고 한다.
법정스님은 수십 권의 수필집을 출간했는데 대표적인 수필집으로는 무소유와 오두막 편지,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등이 있다.
한편 법정스님 생가를 복원하자는 의견이 잇따르고 있다. 문내면에서는 지난해부터 생가 터를 사들여 복원하자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지만 생가가 사유지여서 쉽지만은 않을 전망이다. 박영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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