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욱하(서울향우)
윤욱하(서울향우)

일류 호텔이나 대형 빌딩 출입문, 혹은 자동차 문 꼬리를 잡아주는 사람을 ‘도어맨’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며칠 전 어느 지하철역에서 나는 얼떨결에 도어맨 노릇을 한 적이 있다.
지하철역에서 내가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 역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설 때 어린 딸의 손을 잡고 바로 뒤따라오는 중년 여인이 있었다. 비마저 내리는 날이라 여인의 한 손에는 우산까지 들려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모녀를 위해 문 꼬리를 잡아주는 도어맨이 됐다. 그런데 모녀는 목례나 인사는커녕 내 앞을 S자형으로 피해가듯 빠져나갔다. 
“아니 이럴 수가?” 참으로 황당하고 불쾌했다. 문제는 이와 같은 유사 행위가 우리 사회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지만 고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드나드는 백화점에서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 무심코 앞 사람의 뒤를 따라가다 보면 갑자기 앞뒤로 심하게 흔들리는 문 때문에 당황스러워 불쾌했던 경험은 누구나 한두 번은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럴경우 앞 사람이 뒷사람을 위해 순간적으로 문 꼬리를 잡아주는 사람이 통계적으로 열에 한두 사람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는 가정과 학교의 예절 교육 부재가 가져온 이웃에 대한 배려와 에티켓을 모르는 우리 사회의 현주소라고 말할 수 있다. 지하철 안이나 식당에서 큰 소리의 대화나 전화 통화 역시 예외가 아니다.
우리말의 예절이나 예의를 뜻하는 프랑스어 에티켓은 ‘나무 말뚝에 붙인 표지’의 동사 ‘붙이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 후 궁중의 각종 예법을 가리키는 말로 변했다. 특히 왕과 귀족이 피지배 계층과 자신들의 일상을 구별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하니 에티켓은 태생적으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다.
일찍이 중국의 공자는 「논어」 술이 편에서 ‘도에 뜻을 두고 덕에 근거하며 인에 의지하고 예를 체득하라’고 했다. 또 춘추전국시대의 제나라 재상 관중은 그의 저서 「관자」 목민 편에서 ‘곳간이 차야 예절을 알고 명예와 수치를 안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의식주가 넉넉할 때 예를 갖추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래전부터 선비와 선비 정신을 숭상했다. 선비 정신은 서양의 에티켓과 맞닿아 있다. 체면과 수치를 목숨과 맞바꿨던 선비 정신을 요즘의 정치 지도자나 재벌 총수들은 잊은 것일까? 부자 나라와 선진국은 다르며 값비싼 옷을 입었다고 모두 신사나 숙녀라고 부를 수 없다. 우리도 이제 경제력이 세계 12위 정도에 이르렀으니 예절과 염치를 지키면서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우리가 원하는 행복한 삶 역시 공중도덕과 예절을 제대로 지켜야 누릴 수 있다. 
미국의 철학자이며 시인 에머슨은 ‘인간의 에티켓은 초기 그리스의 예술 작품이나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처럼 단순하지만 놀랍도록 내면의 빛을 발한다’고 했다. 에티켓은 한 사람, 한 사회의 영혼을 드러내는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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