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면 맹진마을 매향비 마모 막는다

해남군은 614년 전 마산 맹진리 뒷산 정상 바위 틈에 새겨진 글씨의 마모를 막는 보존처리에 들어갔다.

 바위 사이에 은밀하게 기록된 마산면 맹진마을 뒷산 매향비가 614년 만에 사람의 손길을 탄다. 해남군은 전남지역 7기 매향비 중 가장 양호한 상태로 알려진 맹진 매향비에 대해 3,000만원을 들여 보존처리 공사를 진행한다.
맹진 매향비는 바위틈 사이에 있어 바람과 햇볕으로부터 어느정도 보호가 되고 있지만 긴 세월동안 글씨의 마모가 일어나 보존처리가 필요한 상태다.
이에 해남군은 매향비를 자연상태 그대로 두되 글씨의 마모를 막는 보존처리만 한다.
조선초 태종 1406년에 건립된 맹진 매향바위 틈새에는 글씨 59자가 음각돼 있다. 
불교신자 58명과 주민 백명이 함께 매향의식을 행했다는 내용의 글이다. 매향의식은 미래불인 미륵부처가 주관하는 세상이 오길 기원하면서 바닷물과 강물이 만나는 갯고랑에 향나무를 비밀리에 묻는 의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과 장소, 관련 인물들을 은밀한 곳에 기록하는데 이를 매향비라 부른다. 
전남에는 7∼8개소의 매향비가 존재하는데 모두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조성된 것으로 변방 바닷가에 위치한다. 이유는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지점에서 매향의식을 행한 것도 있지만 려말선초 잦은 왜구의 침략으로 바닷가 민초들의 삶이 그만큼 고달팠기 때문이다.
이때 서남해안은 왜구의 소굴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왜구가 진도 조도에서 보리농사를 지었을 정도로 왜구의 침략이 잦았고 이에 려말선초 정부는 왜구의 침략에 적극 대응하기 보단 섬과 바닷가 50리 백성들을 내륙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공도정책을 폈다. 이러한 공도정책 결과 진도 사람들은 영암 시종으로 강제 이주하게 된다.
영암 시종으로 이주했던 진도 사람들은 37년 만인 1409년에 다시 해남 삼산면으로 이주해 오는데 이때 조선정부는 해남현과 진도현을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통합해 이름을 해진현으로 개칭한 후 현산면 고현에 있던 해남현 치소를 내륙인 삼산면 계동으로 옮겨 해진현의 치소로 삼는다.
이러한 불안한 시대에 죽산현(옛 마산면‧산이면 지명) 민초들은 미륵불이 빨리 하생해 자신들을 구제해 줄 것을 바라는 매향의식을 행한 것이다. 
특히 매향의식은 비밀리에 행하고 기록도 은밀한 곳에 새기기에 맹진 매향비는 후세 사람들에게 막대한 군량미와 보물이 숨겨진 곳을 기록해 놓았다는 전설을 탄생케 했다.
시대가 어려워질 때 미륵신앙은 성행하는데 해남 길거리 곳곳의 미륵불도 고려말~조선초에 주로 건립된다. 따라서 맹진 매향비는 자신들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세상을 종교의 힘, 신에 의지해 해결해 보려는 민초들의 바람이 간절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조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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