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알기 일환’으로 현산중학교 아이들과 ‘마을 날다’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9월 한달 간 아이들을 세번 만났다. 수업 마지막 날, 금쇄동 마을학교 팀이 준비한 푸드트럭을 학교정문과 본관 건물 사이에 세웠다.
2층 강당에서 플라스틱 의자를 들고 내려온 서른여명의 아이들은 5개 조로 나눠 각각의 ‘마을’을 만들었다. 그리고 마을의 상징인 아지트를 세웠다. 몽골의 게르를 닮은 텐트가 쳐졌다. 여름 더위가 물러간 지 한참이었지만, 코로나 때문에 쓴 마스크가 답답하기는 마을 교사 5명이나 아이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입 주변으로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데도 우리는 잠깐이지만 마을 자치법 만들기를 했다.
우리 모두 행복한 마을 살이를 위해 필요한 것을 스스로 제정하자는 목적이었다. 싸우지 않기, 쓰레기 버리지 않기, 서로 돕기 등 법이라기 보다는 학교생활 규칙 같은 것이 더 많았다.
하지만 성문법도 기독교의 십계명도 그 근원을 따져보면, 공동체 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인류의 지혜가 담긴 것이다. 가깝게는 고조선의 8조법도 맥락을 같이했다.
아이들은 스스로 만든 마을자치법을 공포했다. 다른 마을의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마을 대표가 법 조항을 읽었다. 국회의사당의 망치를 대신해 박수로 법 공포식을 마쳤다.
법을 만들 때 아이들에게 일러둔 것이 있다. 책임질 수 있는 말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전제였다.
마을 교사의 장점은, 수업이 끝난 후에도 종종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추석이 지나고, 아이들과 재회했다. 그날의 경험이 아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법을 만들고, 마을 파티를 열었던 아이들의 경험이, 그 이전과 이후의 삶에 미묘하게나마 삶을 지혜롭게 살기 위한 조각은 마련되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었다. 다시 만난 아이들은 그날의 경험이 발판이 되었을까.
“해남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살아야 행복해질 수 있을까” 와 같은 맥락의 질문을 내게 했다. 무엇을 말해야 하고, 어떤 의미에서 공부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으로 나는 해석했다. 물음에 대한 답을 명확히 해줄 수 없었다. 지금은 물음의 답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아이들 마음에 마을을 보는, 다른 눈이 생긴 것 그 자체가 대단했다.
“예전에는 큰 건물을 짓고, 마을 구획 단위로 이쪽으로 오셔서 이런 것을 해보세요 했다면 지금은 혜린이에게, 나영이에게, 선영이에게 맞는 것을 찾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 그래서 개인이 갖는 고민을 조사하고, 개인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필요해.”
아이들과 말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돌봄’, ‘가사’, ‘희생’이라는 키워드로 묶을 수 있는 가사 노동에 대해 화제가 변하기도 했다. 개인의 삶과 떼일 수 없는 서사가 있는 노동, 그러나 그 가치를 지금껏 인정받지 못한 노동이었다.
수업의 완성은 없다. 아이들도, 나도 함께 그 과정을 버티며 묵묵히 살아가는 것이다. 어쩌면 다 같이 행복하자라는 원론적인 이야기 속에서 아이들에게 삶을 말하는 것은 얼개에 맞지 않을 수 있었다.
오히려 지금처럼, 삶에서 끌어낸 고민을 논의의 테이블에 놓고, 우리 마을에 필요한 일들을 대화하는 과정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깜깜이 논의가 되지 않고, 추상화되지 않는 방식을 현산면에 사는 아이들이 내게 가르쳐 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