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아건물 터, 구 면사무소 밑에 웅장히 존재
해남군도 주민들도 예상밖 발굴성과에 들떠
이순신이 세차례 찾았던 전라우수영의 모습이 처음 확인됐다. 세종 22년 1440년 설치돼 1895년(고종 32년)까지 약 450년 이상 군사적 요충지였고 204명의 우수사가 기거한 안채인 내아와 집무실인 동헌, 동헌으로 통하는 진출입로 등이 발굴된 것이다. 발굴위치는 구 문내면사무소 터이다.
이번 발굴에서 우수영 관아는 명량해협 바다가 조망되는 능선에 계단식 축대와 담장을 두른 위용이 넘치는 건물이었다. 또 우수(右水)라는 이름이 적힌 기와와 상평통보 등 수백여점의 유물도 출토됐다.
이러한 출토유물들로 인해 우수영은 15세기 후반 큰 규모로 축조된 후 16~17세기에 대대적인 중창(重創) 과정을 통해 4동으로 확대된 사실이 확인됐다.
해남군은 우수영 복원을 위해 올 5월 발굴조사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미 사라졌을 것으로 추정된 관아 건물 형태와 연대를 알 수 있는 유물 등이 구 문내면사무소 건물 밑에 오롯이 그것도 웅장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음이 드러나자 해남군도 우수영 주민들도 매우 고무된 모습이다.
지난 10일 발굴현장 설명회를 찾은 명현관 군수도 “이번 발굴조사로 명량대첩의 배후인 전라우수영의 중심 관아터에 대한 실체가 확인돼 전라우수영 경관 복원에 중요한 단서가 제공됐다”며 “연차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전라우수영의 전모를 추적, 대국민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겠다”고 밝혔다.
우수영은 이순신이 세차례 찾은 곳이다. 명량해전 하루 전 진도 벽파진에 머물고 있던 이순신은 1597년 9월15일 우수영으로 진을 옮기고 다음날 16일 새벽 일본군과 전투를 치른다. 전쟁에서 승리한 이순신은 서해안으로 진출한 후 10월9일 다시 우수영으로 찾는데 심한 북풍을 만나 3일간 우수영에 발이 묶인다. 이때 이순신은 왜군에 짓밟힌 우수영의 참사를 듣고 가슴 아파한다.
이순신이 우수영과 인연을 맺은 것은 기록상 3번이다. 명량해전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6년 8월 해남을 순시왔을 때가 첫 번째 인연이다. 이때 이순신은 8월26일부터 29일까지 3박4일간 우수영에 머무는데 잠은 우수영에 있던 태평정에서 잤다.
이때는 전쟁이 소강상태라 이순신은 배가 아닌 말로 이동했는데 아무리 전쟁이 소강상태라 하지만 한 곳에서 이순신이 3박4일을 머물렀다는 것은 그만큼 우수영의 가치가 컸음을 의미한다.
이때 이순신은 우수영 관아를 비롯해 명량해협의 물결을 자세히 들여다봤을 것이다.
특히 이때 이순신의 신분은 삼도수군통제사였고 1차 전쟁인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었던 조선의 영웅이라 우수사와 우수영 주민들의 환호도 대단했을 것이다.
난중일기 기록상 이때 우수영과 첫 인연을 맺은 이순신은 이후 명량해전과 전쟁 승리 후 22일만에 다시 우수영을 찾는데 이때 난중일기에 일본군에 짓밟힌 우수영의 참사에 이순신이 괴로워하고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만큼 우수영은 이순신에게 남다른 곳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