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부터 2년째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복권기금으로 중학생들과 지역아동센터 야간보호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열악한 지역아동센터의 상황을 염두에 두면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야간보호사업을 받은 두란노, 새하늘지역아동센터의 아동들은 다른 지역아동센터의 친구들에 비해 많은 호사를 누리고 있다.
집에서 핸드폰과 씨름할 시간에 친구들과 어울려 얘기를 나누고 시간과 공간의 추억을 간직하기도 한다.
우리 센터에서는 합창, 미술, 글쓰기, 연극동아리, 영화 관람 등의 프로그램의 부요를 경험하기도 한다. 거기에 더불어 야간보호의 꽃인 코로나로 인해 더 많이 증액된 만난 간식 제공을 통한 풍요를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야간보호를 통해 아이들과 아이들, 아이들과 종사자, 아이들과 지역민에게 코이노니아의 삶을 일구는 시간이 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뜻밖의 사건으로 아이들이 아직 공동체의 코이노니아를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간식으로 피자가 나온 날, 피자를 앞에 나두고 아이들은 각자 몇 조각을 먹을 수 있을 것인가를 머리에 담아 뒀던 모양이다.
초등학교 동생이 책상 위 피자에 손을 대자 한 명의 친구가 발끈하기 시작했다. 그 동생이 먹으면 피자가 모자란다고 정색을 하며 초등 동생을 나무라는 것이었다.
옛말에 ‘콩 한 쪽도 반으로 나눈다’ 는 말이 있는데 이미 손에는 피자 한 조각을 잡고 있으면서도 안 먹은 한 사람에게 자신의 몫으로 남겨진 것을 조금도 나눌 수 없다는 마음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지역아동센터에 쏟았던 십여 년의 세월이 허무해지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도대체 아이들에게 난 무엇을 알려주려고 했을까? 우리가 쏟았던 수고가 어디선가 오류가 난 것일까? 밤새 씨름을 했다.
코이노니아, 헬라어로 ‘교제하다’, ‘공유하다’, ‘함께 나누다’, ‘공동체’의미로 기독교에서 사용되는 용어이다. 난 센터를 운영하면서 아이들이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타인을 사랑하고, 미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길 기도해 왔다.
센터의 아이들이 어느 곳에 서 있든지 그 공동체 안에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며, 함께 나눌 수 있는 마음을 가지길 기도하며 센터 운영에 목표점에 두기도 했다. 그런데 그 날 이후, 많은 풍요를 경험 시키고 있다고 물질적 가치 판단을 하던 내게 그 아이는 얘기해 준 것이었다. ‘우리에겐 아직 채워지지 않은 결핍이 있어요’라고.
어려서부터 채워지지 않았던 결핍, 그 어느 누구도 듣기 불편해 모른 척 하는 아픔, 들키지 않으려고 남 몰래 꼭꼭 숨겨놓은 어두운 비밀, 그 쓴 뿌리들이 코이노니아를 방해하고 있었다.
그날부터 생각을 다시 잡았다. 코이노니아를 이룰 것이다. 아니, 상생을 목표점에 두려고 한다.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치지 않고 둘 이상이 서로 북돋으며 다 같이 잘 살아가는 상생을 꿈꾼다.
진정한 풍요, 거룩한 부요를 누릴 수 있는 그날의 멋진 아이들을 만나려고 한다.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를 안고 살아감에도 나또한 아직 코이노니아가, 상생이 어렵다.
그럼에도 코이노니아를 실천하고, 상생을 기꺼이 이루어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 아이들이 조금씩 자랄 수 있음에 감사한다. 오늘도 남 몰래 강도 만난 사마리아인을 돕는 선한 이웃이 우리 주위에, 우리 아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으로 함께 하고 있음에 더욱 감사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