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거시기 있어?”
기억력이 쇠한 탓인지 ‘거시기’라는 말이 자주 튀어나온다. 하고 싶은 말이 생각나지 않을 때, 혹은 앞뒤 말의 호응이라든지 단어의 조합이 원활하지 않을 때 불쑥불쑥.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사용하는 ‘거시기’라는 말이 없다면 의사 전달의 어려움은 얼마나 더할지 모른다.
‘거시기’라는 애매모호한 말로도 대화가 되는 까닭은 주체와 객체의 주파수가 통(通)하기 때문이다.
한석봉의 어머니가 불을 끄며 말한다.
“자, 석봉아 너는 거시기를 쓰거라, 나는 거시기를 썰 테니”
우리 전라도 사람이라면 ‘거시기’라는 말의 의미를 그리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거시기라는 말을 국립국어원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이름이 얼른 생각나지 않거나 바로 말하기 곤란한 사람 또는 사물을 가리키는 대명사. 하려는 말이 얼른 생각나지 않거나 바로 말하기가 거북할 때 쓰는 군소리」라고 되어 있다.
아무튼 나와 아내는 거시기로도 별 어려움이 없이 대화가 통한다. 우리가 ‘거시기의 공감지대’에 있기 때문이다.
송길원의 행복 통(通)조림이라는 책의 프롤로그 한 대목이다.
「흥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때마침 어디서 밥 냄새가 난다. 코를 킁킁거리며 근원지에 다다랐다. 형수가 허리를 숙이고 밥을 퍼 담고 있다. 흥부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마른기침을 하고 나서 “형수님 저 흥분돼(데)요” 당황한 형수, 밥을 푸던 주걱을 가지고 “이 싸가지 없는 놈이~” 귀싸대기를 울리고 만다.」
그저 한바탕 웃고 넘길 이야기 같지만 무릇 세상사는 말이 통해야 한다. 송길원의 말처럼 통(通)하지 않으면 통(痛)한다.(소통이 되지 않으면 아프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크고 작은 문제는 거의 통하지 않아서 생긴다. 그로 인해 고통 받고 불행해진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가 참 거시기하다. 온통 불통(不通) 천지여서 불똥은 힘없는 국민들이 맞는 모양새다. 정치판도 그렇고, 검찰 개혁 문제도, 국민들의 건강을 볼모로 하는 의사 샘들의 논리도, 스포츠계도, 연예계도, 넷 반달리즘(netvandalism) 문제도 무엇하나 제대로 풀리는 것은 없고 나라 구석구석이 곪아가고 있는 것 같다.
이 어려운 시기에 국민의 삶을 책임질 정치판은 소통 대신에 쌈질을, 국민을 어루만지기 보다는 헤게모니(Hegemonie)를 쥐기 위한 줄다리기나 하는 것처럼 보인다.
코로나 블루(corona blue)와 포비아 속에서 멍들어가는 국민의 가슴을 누가 어루만져 줄꼬!
하기야 배아지가 따땃한 이들이 어찌 어려운 이들의 팍팍한 사정을 알겠는가? 놀부 아내가 흥부의 뱃속을 모르듯이.
그걸 알아주기를 바라는 우리가 되레 속창아지 없는 이들이제.
제발 이 어둠이 하루라도 빨리 걷히고 거시기한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공감의 시대」의 저자 제러미 리프킨의 말이 생각난다.
‘다윈의 적자생존이 아니라 공감이 인류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떠오르고 있다.’
소통과 공감만이 갈등 해소의 지름길이다. 통(通)하지 않으면 통(痛)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