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면 황조마을은 정유재란(1597년 8월~1598년 12월) 당시 수군 도독으로 조선에 와 이순신 장군과 함께 왜군을 물리친 진린 장군의 후손들인 광동진씨 집성촌이다.
특히 지난 2014년 7월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이 한국 방문 시, 서울대 강연에서 “한국과 중국은 수천 년을 거쳐 두터운 정을 쌓은 이웃이다”고 강조하고 “명나라 때 등자룡 장군과 조선 왕조의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각각 순직했으며, 오늘날 여전히 명나라 장군 진린의 후손이 한국에서 살고 있다”고 언급해 큰 관심을 모은 바 있다.
황조리에는 정유재란시 명나라 수군도독으로 왔던 진린(陳璘)장군과 그 후손들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한식날 제를 지내는 황조별묘가 있다.
진린은 1598년 군선 500척을 이끌고와 고금도, 녹도, 금당도, 노양포 등에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일본군을 방어했으며. 그는 고금도에서 출정할 때 현몽한 중국 군신 관운장을 모시는 관왕묘도 세우고, 이충무공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자 그의 죽음을 애석해하며 제문을 짓기도 했다.
진린은 처음 이순신 장군과 서로 관계가 좋지 않았으나 이순신이 진린에게 수급을 양보하는 등 공을 세우도록 도움을 주자 점차 이순신에게 감복해 진심으로 이순신을 존경하게 됐다.
이후 그는 명나라 조정에 이순신의 전공을 상세하게 보고해 만력제(萬曆帝)가 이순신에게 8가지 선물(영패(令牌), 도독인(都督印), 귀도(鬼刀), 참도(斬刀), 곡나팔(曲喇叭), 독전기(督戰旗), 홍소령기(紅小令旗), 남소령기(藍小令旗)을 보내도록 하는 데 일조를 했다.
그 후 진린은 귀국했으며 전공을 세운 공로로 광동백에 봉해졌다. 사후에 태자소보(太子小保)에 추증됐고, 그의 손자 진영소(陳永溸)는 1637년 감국수위사(監國守衛使)에 임명됐다.
7년 후인 1644년 명나라 수도가 청나라에 의해 함락되고 의종(毅宗) 황제가 자결하자 진영소는 벼슬에서 물러난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진영소는 명나라가 망하자 진린의 유언을 받들어 조선으로 이주해 귀화했다. 중국 광주(廣州)에서 출발, 해로를 이용해 남해 장승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정착해 거주하다가 나중에 조부 진린이 공을 세운 바 있는 완도 고금도로 옮겨와 살았다. 그 후 진영소의 손자인 진석문(陳碩文)이 해남군 산이면 현재 위치로 이주해 정착했으며, 명나라의 유민이 거주하는 동네라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황조동(皇朝洞)’이라 했다.
1666년(현종7) 호우절도사 유비연 (柳斐然)이 승려 천휘(天輝)와 협력해 사당을 보수하고 사당 앞 동쪽에 별묘를 증설해 진린과 이순신을 배향하고 제사를 받들기 시작하다가, 1871년(고종8) 별묘를 건립했다. 그 후 1960년에 소슬 3문을 신축했고 1976년과 1983년에 중·개수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건물은 목조 기와집으로 사당 3칸, 산문 1칸으로 매년 한식에 봉제하고 있다. 황조별묘는 2003년11월24일 해남군 향토문화유적 제10호로 지정됐다.
우리 고장 황조별묘는 한·중 우호관계의 상징적 산물이며, 이를 관광자원화해 중국 관광객들을 유치하는데도 한 몫을 담당할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지역주민 모두 황조별묘가 향토문화재에서 전라남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도록 관심과 노력이 필요할 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