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교회 여신도회 주먹밥으로 참여
70~80년대 해남민주화 운동 견인
故천임식씨가 남긴 해남5월 항쟁 사진 중 아주머니들이 시위대에게 줄 주먹밥과 계란 등을 준비하는장면이 있다. 해남읍교회 여신도회다.
당시 해남읍교회 여신도들은 故한시석 목사와 함께 민중항쟁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각자 집에서 밥을 준비해 교회에서 주먹밥을 만들어 시위대에 전달했고 이후엔 지금의 군민광장인 구 해남교육청 앞에서 주먹밥을 만들었다.
80년 오월항쟁 이전 해남의 민주화투쟁은 교회가 주도했고 그 중심은 해남읍교회였다. 군사구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언론을 비롯해 종교, 예술, 학문의 자유를 억압했다. 이러한 억압에 가장 반발한 집단이 종교집단이었고 기독교장로회가 강세였던 전남은 기독교청년회를 중심으로 정부에 저항했다.
특히 해남읍교회는 유신독재에 저항하는 시국기도회를 열고 교회 강단에서 독재권력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이러한 활동으로 해남읍교회는 당시 경찰의 가장 큰 감시대상이었다.
해남읍교회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의 저항운동은 1970년 후반 들어 해남YMCA농어민회, 기독교농민회 조직으로 이어졌다. 읍교회 청년들은 기독교청년회 전남서부 연합 소속으로 활동하며 70년대 해남민주화투쟁을 견인했다.
1980년 5월21일 광주에서 시위대가 해남으로 내려오자 수천명의 해남군민들이 일시에 운집했던 것은 해남읍교회를 중심으로 한 민주화운동이 면면히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해남오월항쟁에 해남읍교회 청년회와 여신도회, 남신도회도 조직적으로 참여했다.
해남읍교회 여신도회는 80년 5월을 거친 후에도 생명운동과 민주화운동, 평화운동을 목표로 삼았고 KBS시청료 거부운동, 정신대 문제, 우리농산물 먹기운동, 쓰레기분리수거 운동 등 생활실천 운동에도 앞장섰다.
읍교회의 사회참여에는 故한시석 목사가 중심에 서 있었다. 1979년 부목사로 해남읍교회와 인연을 맺었던 한시석 목사는 1981년 담임목사로 취임한다. 그리고 1981년 오월항쟁 1주년 기념식을 전국최초로 마련하지만 경찰의 원천봉쇄로 무산되고 다음해 다시 기념식을 연다.
한시석 목사는 선교교육원 대학원 논문「한국민중운동과 목회현장」에서 해남읍교회가 민중을 위한 민중교회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밝힌다. 그러한 실천으로 매년 4‧19와 오월항쟁, 8‧15 등 역사적인 날을 기념하는 예배를 매월 열었고 진보인사 초청강연도 이어갔다.
한 목사는 80년부터 90년대까지 해남에서 이뤄지는 민주화 및 지역사회 문제의 연대활동에 항상 중심에 섰던 인물이다.
해남읍교회의 광주항쟁 기념식은 이후 해남사랑청년회와 농민회, 전교조 등이 중심이 돼 열다가 지금은 해남여러 사회단체들이 연대로 열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