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 시인 생가에 왔다. 2019년에 리모델링을 해서 뒤안에 훤하게 마련 된 마루 공간이 참 좋다. 거기 옛 툇마루에 앉아 시를 읽는다.
고개를 드니 뜻밖의 작약이 분홍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시가 잘 읽히겠다. 1989년에 나온『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를 읽는다. 시집 전체가 하나의 시다. 굿 사설을 바탕으로 음보나 말투를 그대로 옮겨온 하나의 장시집이다.
시인의 후기에서 몇 마디 옮겨본다.
‘어느 날 극작가 겸 연출가인 엄인희씨와 무당 겸 현장 운동가 김경란씨가 내 근무처를 찾아왔다. 글 쓰고 연출하고 마당에 설 수 있는 여자 셋이 힘을 합하면 멋진 판이 될 것 같으니 작업을 시작해 보자는 제안이었다. 1년여의 토론이 끝나고 내가 각본을 쓰면 곧바로 엄인희와 김경란이 작업에 들어가자고 결정지었다. 그러나 그게 내 펜 끝에서 도대체 풀리지가 않았다.’
장장 4년간의 장고와 만 9개월에 걸친 쓰기 끝에 이 시집이 나왔다고 한다.
소리 내어 읽었다. 내가 국문과에서 마당극 동아리를 해서인지 풍물판에 오래 있어 온 힘 때문인지 시가 국숫발 들이키듯 술술 읽혔다.
10여년 전 이 시집을 처음 마주하고 소리 내어 읽었을 때는 눈물이 나서 항상 시 한 편을 끝까지 못 읽었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편안해졌는지 아니면 나이가 시인의 작고한 나이를 넘어서인지 참 잘도 읽혔다.
축원마당, 본풀이마당, 해원마당, 진혼마당, 길닦음마당, 대동마당, 통일마당, 뒷풀이로 순서 지어진 시를 읽어가다 보면 한국현대사가 다 들어있다.
굿 사설을 들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처음에 들을 때는 하나도 제대로 들리지 않고 무당혼자웅 얼웅얼하는 것 같다. 제대로 듣기 힘들고 들어도 해설하기 힘든 사설을 1년을 공부하고도 풀리지가 않았다니, 전통 굿이 가진 독특함은 대단한 것 같다.
그런데 고정희 시인은 그 4년 동안 지리산을 다니며 유럽을 다니며 이 시를 착상하고 구상하고 글로 썼다. 그렇게 정신 나간 사람처럼 돌아다녀야 나올 시다. 소리 내서 꼭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시집 한 권 소리 내어 읽는 시간이 2시간이 채 안 걸렸으니 해볼 만하다.
넷째거리 진혼마당 - 넋이여, 망월동에 잠든 넋이여 중 ‘8.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 돋아’를 옮겨본다.
하늘도 파랗고
들도 산도 파란 오월에
일천간장 각뜨는
수백 수천 무덤 앞에
아들 제상 차려 놓고 어머니 웁네다
딸 제상 차려 놓고 어머니 웁네다
소주 한 병
새우깡 한 봉지
쿨피스 한 잔 사과 한 알
붉은 카네이션 한 송이 꽂아놓고
넋나가고 혼나간 어머니 웁네다
아제, 한잔합시다…음복하는 어머니
날 잡아잡숴, 주저앉아 웁네다
인간의 삼 넋 중에
한 넋만 없어도
깜부기꽃이 되는 법 아닙니까
광주항쟁 난리통에
넋나간 우리 어머니 신병은
병원 가도 못 찾고
의원 가도 못 찾고
먹던 밥상 물린 지 팔년 세월
자던 잠 멀리한 지 팔년 밤낮
그리운 건 오매불망 우리 애기 그린
얼굴 (후략)
소주 한 병, 새우깡 한 봉지, 쿨피스 한 잔 사과 한 알 하는데 눈물이 앞을 가린다. 자식 제상은 이런 거구나, 자식 제상 앞의 엄마는 이런 거구나 싶어서 찡한 한숨이 난다.
그나저나 세 사람은 염원대로 한판굿을 벌였을까? 말로만 하는 굿은 신명도 덜하고 한풀이도 덜한데. 이 굿시 처음에 읽을 때 이거 공연하면 대박이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설이 하도 길고 내용도 많아서 공연자가 힘은 들겠지만 신명나는 푸닥거리 한 판 벌이면 답답하고 잔인한 이 세상사 좀 진정되지는 않을까? 고정희 시굿판 한 번 걸판지게 차려봤으면 좋겠다.
사람들 힘 모태서 마음 모태서 돈 모태서 한 많은 사람 한 풀이하고 시름 많은 사람 시름 풀이하고 걱정 많은 사람 걱정 풀고 눈물 많은 사람 눈물 같이 흘리고 그러고 나면 답답한 속이 좀 개안해질 것만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