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읍성은 도시개발로 그 흔적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 작금에 들어와서는 청사 앞 노거송과 군청 뒤 잔존성벽이 해남읍성의 전부라 여기게 될 정도이다. 조선시대 동헌 건물에서 시작된 청사는 곧 새로운 청사시대를 준비 중에 있다. 이에 더해 해남군 치소에 세워졌던 읍성의 역사도 한 번 생각해 보자.
해남읍성은 조선시대 읍을 왜구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관방시설이었다.
읍성의 형태는 보통 방형인데 해남읍은 드물게 원형에 가깝게 축조됐다.
실측한 성벽 길이는 약 1.3㎞이며 지금의 성내리 행정구역과 일치한다. 성안에는 군청, 예술회관, 군민광장, 해남서초, 농협군지부, 새마을금고 등 기관이 분포한다. 이제 새로운 청사는 읍성 밖으로 나가므로 사실상 수성리 군청시대를 여는 셈이다. 해남읍성의 축성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어느 정도 추정은 가능하다. 삼산면의 옛 녹산역 터에 있었던 해진군이 1437년에 분군해 진도는 섬으로 들어가고, 해남현은 치소를 해남읍 성내리로 옮겨왔다. 일반적으로 읍성은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신 객사와 현감의 근무처인 동헌 등을 선축한 후 축성한다.『동국여지승람』에 객사가 등장하고 읍성의 일부분인 남문루각 정원루(靖遠樓)는 ‘1469년(예종 1)에 현감 성중성(成重性)이 완공하였다’했으므로 읍성도 이 무렵에 완공됐음을 알 수 있다. 해남읍성의 공간 구성은, 읍성안의 중앙 북단에는 주요 관아를 배치하고 그 앞으로 남북대로와 동서대로를 두었다. 남북대로의 남단에는 남문(롯데리아 인근)을, 동서대로 양쪽에는 동문(예술회관 남동쪽)과 서문(서초등학교 체육관 서남쪽)을 뒀다. 조선후기에 제작된 고지도 등에서 관아의 배치 모습도 읽을 수 있다. 동헌과 객사는 특별히 담으로 둘러싸여 있어 그 중요함을 알 수 있다. 동헌은 ‘금성헌’이라 별칭했고 현군청 본관 자리이다. 그리고 객사는 ‘침명관(浸溟館)’이라 했으며 예술회관 마당에 있었다. 또 장청은 6칸으로 객사의 남쪽인데 구 경찰서로 현 농구장이다. 그런데 객사(13칸)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신 관계로 현감의 집무청인 동헌(4칸)보다 격이 높았다. 특별히 객사를 침명관이라 칭한것은 해남현의 옛 이름에서 유래한다.
마한소국의 침미(다례) 이어 통일신라 시기 침명(현)과 밀접하다. 객사 침명관에서 해남군의 오랜 전통성을 읽을 수 있다. 객사는 일제강점기에 해남보통학교, 군청의 사무실 등으로 이용됐다.
정원루는 해남읍성의 남문루각이 었는데 일제강점기까지 해안루라 개칭돼 존재했다. 정원루의 남문통에는 한양과 같이 장시가 형성됐고 해남천 냇가에는 홍교(虹橋)가 있었다.
홍교는 신안리의 우슬재와 대흥사 등을 연결했으므로 사람들이 늘 붐볐다. 홍교의 원래 이름은 남천교였으나 1781년 현감 김서구가 중수하고 홍교라 개칭했다. 이와 관련된 중수비가 신 군청사터에서 청류정(淸流亭) 비석과 함께 발굴됐다. 청류정은 홍교옆 하천에 버드나무와 함께 있던 정자로 오가는 사람들의 쉼터였다. 그리고 해남서초등학교에는 지금의 총무과인 이방청, 만수정이라는 정자, 사창감독청, 사령청 등이 있었다.
1910년 전국의 읍성은 일본의 철거령으로 소멸되기 시작했다. 현재 복원된 읍성은 대표적으로 수원읍성을 들수 있으며 유네스코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이외에도 해미·거제·언양·고창·낙안·고흥·진도 등 많다. 광주는 도시개발로 복원이 어렵게 되자 그 흔적을 예술로 표현했으며, 낙안읍성은 민속촌에 이어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을 준비 중에 있다. 전국적으로 해남군과 같이 읍성을 철저히 외면하는 곳을 찾기가 어렵다. 해남은
동헌자리에 세워진 군청은 곧 옮기고, 이방청 등이 있었던 서초교의 이전을 놓고 의견만 분분하다. 조선시대 해남읍성은 해남군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즉, 현 해남군 역사는 읍성에서 시작했다. 해남도 군민들의 지혜를 모아읍성 흔적 찾기를 시작할 때라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