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읍에서 조선시대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해남군 청사 앞 노거송과 군청 뒤 잔존성벽 정도이다. 그런데 구청사 본관 아래서 조선시대 건물터가 확인됐다.
건물터는 조선시대 해남읍성 내 유일한 건물유적이자 최초이며 또 해남현을 관장했던 현감의 집무실인 동헌(東軒)이다.
동헌은 1437(세종 19)년 삼산면 녹산역 인근에 있던 해남현 치소가 이전해 와 지어졌다. 지금으로부터 585년 전이다. 동헌은 여러 관아 중 으뜸으로 해남현의 심장이다. 이러한 터가 우리의 눈앞에 실체를 드러냈으니 실로 감격스럽고 기뻐할 일이다.
그런데 이번 조사는 건물의 일부 존재만 확인하는 시굴조사의 결과이니 전체 윤곽은 아직 알 수 없다. 전면 발굴조사를 해야만 그 건물의 규모나 성격을 알 수 있다.
이번 시굴조사에는 건물의 기초석과 개축 흔적 등이 확인됐는데, 동헌과 객사 일부로 비정된다. 동헌은 조선후기 고지도나 일제강점기 기록 등을 보면, 그 위치나 규모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동헌과 객사는 해남읍성 중앙부에 위치했으며, 특별히 방형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고 정면에는 별도의 대문을 둬 그 중요성을 알렸다.
동헌 담장 안에는 아사(衙舍 4칸)가 있고, 건물 이름은 금성헌(琴星軒)이라 별칭했다. 동헌은 현감의 사택인 내아(內衙 3칸)와 문서편찬과 인쇄를 했던 지금의 발간실 격인 책실(冊室, 3칸)로 구성돼 있다.
현 해남군정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동헌 건물에서 시작됐고 객사로 확장됐다. 객사는 일제강점기에 해남보통학교에 이어 군청 사무실로 이용됐다.
해남읍성의 공간 구성에서도 동헌이 관아의 핵심임을 알 수 있다. 중앙 북단에 동헌을 두고 정면의 남대로 끝에 남문을, 동서대로의 양쪽에 동문과 서문을 뒀다. 따라서 동헌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다. 585년의 해남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는 핵심 유적이다.
동헌은 조선시대 이후에도 해남의 심장이며, 역사와 정체성을 압축한 곳이다. 이러한 동헌 일대가 이번 시굴조사에서 확인됐으니 해남 보물 중의 보물이 확인된 셈이다.
그런데 이번 시굴조사는 군민광장을 조성하기 위한 절차로 추진됐다. 해남군은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다시 덮는다고 한다.
이에 대한 궤도수정과 역사성에 대한 마인드가 절실하다. 보물인 동헌 유적을 콘크리트로 덮고 만든 단순한 광장은 아니어야 한다.
대신 장구한 역사와 문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해남현 동헌(또는 침명)을 무대로 조성했으면 한다. 예컨대, 동헌 건물 등은 개방형으로 복원하고 여름철 군민의 쉼터, 국악, 판소리 등 공연무대 등으로 활용했으면 한다. 무대는 수성송과 성벽, 신청사와 어우러지는 멋진 문화예술 공간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내아 등 건물 터를 표지석이나 강화유리로 처리해 건물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게 하자. 이로 인해 새로운 해남역사와 문화예술의 장이 열릴 것이다. 이를 위해선 전면 발굴은 필히 이뤄져야 한다.
전국의 읍성은 1910년 일제의 철거령으로 소멸되기 시작했다. 현재 복원된 수원읍성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됐고, 낙안읍성은 민속촌에 이어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을 준비 중에 있다.
고창군은 읍내 모양성에 이어 무장읍성도 최근 복원했다. 반면 해남군은 철저히 외면했다.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강조하면서도 건설공사의 장애물로 간주하고 그 중요성이나 절차를 간과한 일이 하나둘이 아니다. 우리는 부지불식간 미래세대에 죄짓는 우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해남의 미래는 과거를 기반으로 설계해야 차별화되고 경쟁력도 더욱 높아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