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으로 귀촌한 2년이 지나갔다. 전통 한옥으로 집을 짓는 일, 문학촌을 가꾸는 일, 시골에 정착한 시간이 이렇게 훌쩍 지나갔다. 각박한 도심의 사람들과 인연을 끊었는데 고향에서 인연이 만들어져가는 일상들이 당혹스럽기도 하고, 삶과 세상에 서툰 탓에 허우적거린다. “가지 않는 길”(The road Not Taken)을 만났다.
얼마 전 땅끝, 달마산 산악회 20주년을 맞는 기념 축시를 청탁받고 산악회 땅끝농협 송전무와 인연으로 순창 용궐산을 다녀왔다. 울창한 숲과 섬진강 돌길은 사색을 즐기기에 좋았다. 용궐산은 한평생 살아온 사람들이 바위에 남긴 ‘흔적의 언어들’이 있었고, 그 언어들은 필자의 가슴을 사로잡았다. 가파르면서도 느림의 미학으로 산과 강으로 흘러가는 물소리를 듣는 아름다운 산행이었다. 나뭇잎 사이로 투영되는 햇빛을 보고 오솔길의 구브러진 곡선을 응시하며 숲이 전하는 애잔한 소리도 들었다.
달마 산악회는 김재현 선생의 건강한 길 찾기 여행을 시작으로 성장했다. 마을의 김영식 회장 중심으로 선후배를 존경하고 배려하는 마음과 질서정연한 부드러운 우정이 더하고 있었다. 회원들은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면서도 동고동락을 하듯 연대 의식으로 일심동체가 되는 모범적인 산악회로 걸어왔던 것은 배려와 나눔의 실천에서 그 면면을 읽을 수 있었다.
우리는 생을 살아가면서 늘 어떤 선택을 했다. 한 가지의 길을 택하면서 다른 길을 포기해야 했고, 망설이다 회한이 따랐다. 아쉬움과 담담함으로 삶의 순간을 성찰할 수 있었기에 “가지 않는 길”이란 문구는 필자에게는 늘 떠나지 않는다. 잠시지만 모든 걸 멈추고 인생을 더듬어 보는 시간을 준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빛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빛이 없으면 당연히 세상 모든 생물은 멸종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눈에 태양 빛은 투명하게 보이지만 사실 태양 빛 속에는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색깔의 빛이 혼합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을 실험을 통해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과학자 뉴턴이었다. 뉴턴은 태양빛의 성질을 알아내기 위해 프리즘을 이용해 실험을 했다. 우리 눈에 투명하게만 보이던 태양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니 일곱 가지 색깔을 띤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이처럼 빛 하나만 놓고 볼 때도 세상은 다양한 색깔을 가진 것들이 하나가 되어 살고 있다. 그리고 세계가 점점 글로벌화 되니 대립보다는 화합을 미덕으로 여기게 되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로 존립을 하고 있고 형제처럼 살아가고 있다.
달마 산악회 회원들은 농사 시기와 어업 시기가 다르지만 한번도 정기산행을 미루거나 다음 달로 넘기지 않는다. 여기에 평균연령이 육십대와 칠십대가 주이고, 사오십대는 극소수다. 고령화 시대를 보면 오늘의 칠십대는 오십대와 같다. 산악회 회원들 가운데는 아버님 같으신 회원도 있다. 이태 전에 떠나신 아버님 생각이 일어났다. 언제부터인가 어른을 공경하는 문화가 떨어지고 있다. 역사도 문화도 역경을 살아온 어르신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이 있었듯이 달마 산악회는 인간애로 결속된 자양분 같은 본보기를 볼 수가 있었다.
우리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유와 고독이다. 자유란 인간에게 숨 쉬는 산소호흡과 같고, 고독은 예술의 신(神)과 대응하는 맑고 순수한 정신적인 사유로 밀도의 외로운 상황이지 않겠는가? 산행을 통해 정신과 육체가 건강하고 고독과 영혼의 치유를 기대하는 땅끝, 달마 산악회가 우리가 사는 지역문화의 향수가 되고 인문주의가 되살아나는 고귀한 단체로 기대한다.
4월이다. T.S.엘리엇은 <황무지>에서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 불렀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로 시작된다. 죽어 없어질 줄 알면서도 생명을 탄생시키기 때문이리라.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는 겨울이 오히려 따뜻했다고 말한다. 4월은 세월호 등 크고 작은 사건들이 우리 사회에 많았다. 위대한 삶도, 시시한 삶도 없어 보인다. 땅끝, 달마 산악회처럼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가볼 일이다. 삶과 죽음이 언제나 길 찾기 여행에 있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