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최하림(1939∼2010)은 신안군 팔금도 출신이다.
미술평론가 원동석(1939∼2016)은 해남 출신이다.
두 사람이 목포에서 고등학교 시절부터 문학 활동을 같이하면서 평생을 함께한 각별한 사이였다.
그 시대의 지식인들이 그러했듯 두 사람도 현실의 삶은 어려웠지만, 이상에 대한 꿈과 그 꿈을 실현하고자 일생을 살아갔던 분들이라 여겨진다.
최하림 시인은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한국 시단에 한 획을 그은 시인으로 평가받는 시인이다.
민중미술의 대부라 할 수 있는 원동석 선생의 미술 운동도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던 그 시대의 귀한 정신적 유산이라 여겨진다.
자타가 공인할 만큼 유별난 성격의 원동석 선생도 최하림 선생과는 원만한 관계 속에 만나면 온갖 이야기들로 밤새는 줄 모르고 도란도란 시간을 보내곤 했다.
최하림 선생이 돌아가시고 원 선생은 먼저 간 친구를 많이 그리워했다.
손수 통나무를 다듬어서 최하림 선생의 시비를 만들어 최하림 선생의 양평 집 뜰에다 세우기도 했다.
최하림 선생이 전남일보 논설위원을 지내던 시절 사모님과 함께 해남 우리 집을 자주 방문하곤 했다. 아마 섬마을 출신의 선생이 바다가 보이는 우리 집이 정겨웠던가 보다. 그 시절 ‘화원 가는 길’이라는 시로 인연을 화답해주었다.
내가 원 선생과 결혼 후 긴 공백을 깨고 서울에서 갖은 전시회에 최하림 선생이 써준 평문은 내 부족한 그림을 평해준 좋은 글이었다.
이제 두 사람 다 다른 세상으로 간 지 한참이 지났다. 얼마 전 최하림 선생의 부인이 우리 집을 방문했다. 이제 두 사람만 남은 우리는 각자의 마음속에 간직한,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사연들을 나누면서 함께한 시절을 추억했다.
네 사람이 제주도로 설악산으로 함께 여행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해서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최하림 선생이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지독한 가난을 겪어야 했던 유년 시절과 엄청난 독서와 독학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했던 이야기, 그 시절에 신춘문예에 등단한다는 것은 목포의 문학청년들에게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경사였다는 우리들의 추임새도 곁들였다.
목포에서 맨 처음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연극을 공연하며 목포의 문화활동을 이끌어가던 그 시절 문학청년들의 아름다운 일화들, 꽃사슴처럼 아름다웠던 사모님을 연모해 매일같이 편지를 보낸 이야기, 결혼 후 자라나는 자녀들을 부양하기 위해 밤낮으로 잡문을 써야 했던 힘든 가장으로서의 무게를 덜어주지 못했다고 고백하는 사모님의 아픈 마음들, 그 옛날 만나면 밤늦도록 최하림 선생과 원 선생이 쏟아내던 이야기 꾸러미들처럼 두 미망인의 시간이 이어졌다.
나는 나대로 주절주절 원 선생과 못다한 회한을 풀어내면서 과거와 작별하는 우리들의 만의 의식을 치렀다.
삶의 인연이란 건 아마도 그렇게 이어져 가는가 보다. 누군가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올가을에 팔금도 최하림 선생의 고향에서 최하림 선생을 추모하는 행사가 신안군의 주최로 열린다고 한다.
최하림 연구회 회장은 황지우 선생이 맡고 계신다. 참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그리고 부러웠다. 시인으로서 참 잘살다가 가신 최하림 선생의 그 서글서글한 모습이 인간의 면모로서 부럽고 그리웠다. 세 분 자녀들도 훌륭하게 성장해 우리나라 문화 예술계의 각 분야에 종사하고 있다.
어느 해인가 광화문 교보빌딩 전면에 최하림 선생의 시구가 커다랗게 내걸린 적이 있었다.
봄이 부서질까 봐
조심조심 속삭였다.
아무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시인은 오늘도 내 곁에서 이렇게 작은 소리로 속삭이고 계시는가 보다. 순간의 아름다움을 소중하게 간직하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