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순/화원미술관 관장
이정순/화원미술관 관장

 

 김용옥 선생의 저서「중국 일기」를 읽었다.
선생이 2015년 중국 연변대학교에서 6개월간 대학원 수업을 위해 기거한 동안 연변지역 일대의 고구려 유적들을 발로 찾아다니며 촬영한 사진들과 글들로 전 5권에 걸쳐 방대한 역사적 기록들과 단상을 역은 저서다.
1권과 2권, 3권은 주로 고구려 유적들인 장군총과 많은 왕릉에 관계된 이야기들이고 4권과 5권은 만주지역 근대사에 얽힌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선생의 다른 저서들도 그렇듯이 철저한 역사적 고증을 거쳐 그 시대의 인물들에 대한 시대적 소명과 역사적 사실들이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어 나는 이 여름을 행복하게 책 속에서 지낼 수 있었다.
광개토대왕 능이라 알려진 장군총을 비롯해 수많은 왕릉의 모습, 여기가 그 안시성이 아닌가 싶은 황량한 유적지, 바로 고구려 사람들이 저만치서 고난을 통해 한 시대의 빛나는 문명을 이루면서 살았거니 싶다.
고구려라는 역사는 지금 국경이 중국이냐 아니냐의 문제를 떠나 우리 민족의 생생한 유산이며 지울 수 없는 우리들의 패러다임이라는 선생의 글에 깊이 공감한다. 
1994년 9월 초 그림 그리는 동호인 10여 명과 함께 백두산과 연변지역, 심양에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그때 만난 만주벌판은 가도 가도 끝없는 비옥한 농경지의 연속이었고 그 풍부한 물산이 고구려라는 문명의 자양분이라 여겨졌다.
거대한 장군총과의 만남은 그 시절 어떻게 저런 석조물이 세워질 수 있을까 하는 의아함이 가득한 느낌으로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다. 
우리 일행은 눈보라 치는 백두산 천지에서 두 번 오기 힘든 벅찬 감동을 시간을 뒤로하고 백두산을 걸어서 하산하자는 의견이 결정돼 6시간을 걸어서 하산했다. 
9월 초의 그 여섯 시간은 산을 하나 넘으면 봄이고 그다음을 여름이고 또 산을 넘으면 가을이었고 다음은 눈보라 치는 겨울이 기다리는 장대한 백두산의 넓은 품을 체험한 시공간의 시간이었다.
말보만 듣던 백두산 야생화 언덕의 아름다움은 우리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고 지평선이 보이지 않도록 끝없이 펼쳐지는 만주벌판은 이 땅 모두가 고구려였구나, 하는 잃어버린 문명을 아쉽게 느꼈던 것 같다.
백두산과 일대의 고구려 유적들은 참 넓고도 아득하고 형용할 수 없을만큼 신비한 체험을 내게 준 시간이었다. 자연 속에 담긴 수억 년의 세월을 만난다는 건 교만한 인간들이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번 여름에 내가 김용옥 선생을 통해 다시 만난 고구려는 내 개인적 추억과 함께 내게 새로운 소망을 일깨워줬다. 지도위에서 선으로 그어진 국경선을 훌쩍 뛰어넘고자 하는 그런 강렬한 마음 말이다.
나의 손주 세대들이 기차를 타고 평양을 거쳐 신의주를 통과하고 백두산에서 자부심을 느끼고 두만강을 건너 만주벌판을 끝없이 달려 보았으면 좋겠다.
이제 저만치 세월이 정지돼버린 내가 손주들을 핑계 삼아 꿈꾸어보는 건 자유와 전진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 아닌가 한다. 바로 지구의 주인이 된 사피엔스들의 본능 말이다.
고구려의 그 힘겨웠던 고난의 세월과 위대한 문명이 수많은 돌무더기 무덤들을 통해 지금도 우리에게 전해진다.
문명은 언제나 힘겹게 얻어낸 위태로운 성취라는 것을 알았으며 살아있는 자들의 운명이 그들 앞에 살았던 자들의 운명과 뗄 수 없이 묶여 있다고 믿기에 오늘 다시 한번 우리에게 있어 고구려 패러다임은 어떤 의미로 잠재돼 있을까 생각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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