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훈(문화마실 대표)
김성훈(문화마실 대표)

 

 여수·순천 10·19 사건이란 정부 수립의 초기 단계에서 여수에서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14연대 일부 군인들이 국가의 제주4·3사건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사건이다. 이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당했다.
여순사건을 공부하던 중 해남과 관계된 인물을 발견했다.
한 인물을 놓고 다양한 평가가 내려질 수 있지만 평가는 미뤄두고 당시 언론 등에 소개된 그의 일화를 공유하고자 한다.
해남 제5대 군수였던 유수현. 그는 해남에 194981일 자로 취임해 1952220일 이임한 인물이다. 27개월 동안 해남 군수를 지냈던 그는 전남 강진 출신으로, 6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유수현은 해남 군수로 오기 전 구례 군수를 지냈다. 19481024일 새벽, 지리산으로 입산한 봉기군이 구례읍을 점령했을 때다. 봉기군들이 경찰과 우익진영을 색출하기 위해 민가를 수색하는 등 분위기가 꽤 험악했지만 당시 봉기군에 의해 경찰과 우익 인사의 희생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이때 구례군수 유수현은, “봉기군은 신사처럼 행동했으나, 이에 비해 정부의 위신은 떨어졌다고 평가한 대목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봉기군이 구례에 온다고 하자 구례에 있던 경찰과 국군이 모두 남원으로 도망가 버렸기 때문이다. 또한 봉기군은 주민들의 식량만 가지고 갔지만, 국군은 식량, 의류, 이불까지 가져가는 바람에 주민의 불평이 많았다고 한다.
지리산이 있는 구례에서는 오랫동안 빨치산과 토벌군 사이에 전투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군민들은 배고픔과 추위 속에서 연명해야만 했다.
이에 유수현 군수를 비롯한 시국대책위원회는 서울로 상경해 이승만 당국에 이재민 공동 수용소를 설치해 지리산 부근에 집단 부락을 만들어 구호치 않는다면 반도 토벌의 작전상 지장이 많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아사를 면치 못할 것이며, 특히 군경을 도와 반도 격멸 시에 희생당한 대한청년 단원들의 유가족에 대한 대책이 없다면 향토 방위상 지장이 많을 것이다며 정부의 적극적인 구호 대책을 요구했다.
동광신문 1949127일 자 신문에는 신문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내 손에 우선 돈 이천만원이 있다면 가련한 이재민들의 기한을 덜어줄 자신이 있지만은이라면서 아쉬움을 토로한 내용도 남아 있다.
이러한 유수현 구례군수의 활동으로 그 지역에서는 공덕비 건설이 논의되기도 했다.
이후 유수현은 해남군수로 영전해 신임지로 출발하면서 구례 지역에 순직한 전몰 용사 군경관민 합동 충혼비건립비 십만원을 비롯해 각 단체 기성금으로 많은 금전을 희사했다. 당시 구례 군민들은 이에 크게 감격했다는 내용이 동아일보 1949818일에 실려있다.
5천년 역사상 최초의 신생 공화국이 수립되었을 때, 이승만 전대통령은 사람의 몸에 한편이 죽어가는 경우에는 살아있는 편이라도 완전히 살려서 죽은 편을 살리기를 꾀할이라는 정부수립에 관한 생각을 밝혔다. 제주4.3사건이 발생하기 한 달 전의 발언이다. ‘살아 있는 편을 위해 떼 놓은 현대사의 비극을 역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10·19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 1주기가 지났고, 지지난해와는 위상이 다른 과거사 해결을 위한 독법의 여정은 이제 막 시작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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