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덕봉은 미암 유희춘의 아내다. 그녀는 신사임당 허난설헌 등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여류시인이었다.
미암이 아내의 시를 모아서 펴낸 <덕봉집>에는 38편의 작품이 실려있다. 
자연을 노래한 시도 있지만 대부분 남편 아들 사위 조카랑 주고받은 시다. 신사임당을 생각하면 어머니를 그리는 시가 떠오르는데 송덕봉의 작품들은 부부의 애틋한 사랑과 가족의 정을 생각하게 한다.
<미암일기>에 재미있는 글이 실려있다. “부인(송덕봉)이 취중에 시를 읊었다. 내가 차운(남이 지은 시에 운을 맞춰 시를 지음)하여 시를 지었다.”
때는 조선시대. 아내는 술에 취해서 시를 짓고 남편이 그 시를 받아서 답시를 쓰는 부부라니 멋지지 않은가?
미암과 송덕봉은 금슬이 좋은 부부였는데 마음이 통하는 지기知己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미암이 19년이나 귀양살이를 하다보니 둘은 떨어져서 지낸 날이 많았다. 살림은 오롯이 집에 남아있는 아내의 몫이었다. 시어머니의 삼년상을 혼자서 마친 송덕봉은 집을 나선다. 귀양살이하는 남편을 만나기 위해 땅끝 해남에서 땅끝 종성까지 3천리길을 걸어갔다. 
이때 송덕봉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시가 태어났다. 
‘걷고 또 걸어 마천령에 이르니/동해는 거울처럼 끝없이 펼쳐있구나/부인의 몸으로 만리 길 어이 왔는가/삼종의리 중하니 이 한 몸 가벼운 것을’ 
부부의 평생소원은 미암이 귀양살이와 벼슬살이에서 풀려나 함께 지내는 것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 미암이 해남으로 돌아오던 날. 송덕봉은 떨어지는 눈물을 훔치는 대신 붓을 든다.
‘삼십년 된 오랜 옛 집에/이제야 나란히 돌아왔네요/말끔히 새로 지은 동당東堂에서/벼슬 버리고 한가히 쉬시구려’
(시의 해석은 심미안에서 펴낸 <국역 덕봉집>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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