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일도/(전)재광주해남군향우 회장)

 

 해남군 출신으로 광주에 거주하는 향우 중, 서로 가깝게 지내거나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친목을 도모하는 소모임이 많다. 필자가 참여하고 있는 ‘풋나락회’도 그런 모임 중 하나로 15명 정도가 매월 1회 정기적으로 모이고 있다. 
2022년 연말에는 고향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부부동반으로 약 25명이 고향을 찾았다.
관광버스를 타고 문내면 우수영 쪽부터 둘러보았다. 명량대첩 유적지, 해상케이블카, 법정스님 생가와 황산면 공룡박물관을 답사하고 대흥사 입구에서 점심을 먹었다. 
울돌목에 가면 언제나 그렇듯, 충무공의 애국심과 용기, 지혜가 생각나고 나이를 먹은 지금까지도 가슴이 뛴다. 정리가 된 법정스님의 생가터와 마을도서관은 최근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필자도 처음 가보았다. 법정스님은 1932년 11월 우수영에서 출생해 2010년 3월 입적하셨다. 1963년 전남대학교 상과대학(필자는 이번 마을도서관 방문 전에는 철학과로 알고 있었음)에 입학했고, 1965년 재학 중 서울에서 출가했다. 해남은 법정스님의 육체와 정신의 뿌리에 자양분을 공급한 곳이다. 스님은 입적하시기 전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습니다. 화장 후 사리도 찾지 말고 탑이나 부도도 절대 세우지 마라“는 유지를 남겼다. 그래서인지 해남군은 생가 터를 아주 소박하게 정리해놓았다. 
우리 일행은 점심을 먹고 난 후 대흥사 대웅전을 비롯한 사찰을 돌아보았고, 필자를 비롯한 4명은 약 2km 정도의 비탈길을 따라 진불암(眞佛庵)에 올랐다. 필자는 1978년 7월28일 절친한 친구와 둘이서 옥천면 집에서 삼산면 대흥사로 놀러간 적이 있다. 그때 막차를 놓쳐 돌아가지 못해 난처해하고 있는데, 진불암 상좌스님이라는 분이 “진불암에 가서 주무시고 가라”는 권유에 진불암에서 하룻밤을 자고 그 다음날 북암을 경유해 정상인 구름다리까지 다녀왔다. 그날 밤 자정이 넘도록 진불암의 주지 고훈(高焄)스님의 유익한 말씀을 많이 들었다. 이것이 인연이 돼 고훈스님이 매번 저서를 출판할 때마다 옥천면 집으로 책을 보내주셨다. 책 제목은 「숲속의 이야기」 「구름의 품안에서」 「수평선의 희망」 「기러기의 고향」 「태양에 생명이 있다」로 불교 교리를 해설하고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식으로 엮은 책인데 1981년 5월까지 5회에 걸쳐 보내주셨다. 그때 필자는 다른 공부를 하고 있던 중이라 책들을 자세히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도 소중히 소장하고 있다. 
1978년 여름 진불암에서 스님을 뵌 이후로 한 번도 뵌 적도 없어 궁금했는데, 1990년대 중반엔가 이미 돌아가셨다는 말을 지인에게 들으니 매우 섭섭했다. 이번에 진불암에 올라간 것은 약 45년 만으로 두 번째이다. 45년 전의 귀한 책들을 돈으로 계산할 수는 없지만 소정의 돈을 응진당(應眞堂) 불전함에 넣고 경건한 마음으로 삼배하고 나왔다. 마당으로 나와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고훈스님의 숨소리인양 한바탕의 바람이 스쳐갔다. 
스님은 그의 저서에서 “바람아 너는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라 기압을 따라 움직이고 있을 뿐이란다. 기압이 평정되면 가고 옴이 그치므로, 가고 옴이 그치는 곳이 바로 네가 오는 곳이요 가는 곳이요 머물 곳이니, 너의 기점은 공(空)도 유(有)도 아니며 어느 시점도 아니란다”라고 썼다. 
어찌 바람만 인연 따라 생멸하겠는가? 삼라만상이 다 연기(緣起)했다가 흩어지나니 인간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고즈넉한 진불암의 산사 풍경을 머리속에 간직하며, 광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옛날의 고향집과 고향마을을 둘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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