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독립이 될 줄로 아는가?”경성지방법원 일본인 검사가 3‧1독립선언을 주도했다는 죄목으로 잡혀 온 양한묵 선생에게 물었다.
“반드시 되리라는 생각은 없어도 독립을 계획하는 것은 조선인의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검사가 다시 물었다.
“앞으로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주저 없는 대답이 이어졌다.
“앞으로도 기회만 있다면 할 생각이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유일한 전남 출신 양한묵 선생의 재판기록이다.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백성이라고 보기 어려운 기개가 보인다.
선생은 서대문 형무소로 찾아온 아들에게, “몸과 마음이 편안하니 염려하지 말라”는 쪽지를 전달할 만큼 자상한 아버지였다.
그러나 선생은 곧바로 죽음을 맞는다.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채 가시지 않은 1919년 5월26일. 일본 경찰의 가혹한 고문에 희생되고 만 것이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유일한 옥중순국이었다.
지강 양한묵 선생은 1862년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7살에 어머니에게서 천자문을 배울만큼 총명했다. 19세에 결혼 후에는 고향을 떠나 능주(화순)에 정착했다.
선생은 화순에서 사형을 당하게 된 동학농민군 포로들을 구출하는데 적극 나선 적이 있는데, 이를 아름답게 본 능주목사 조존두의 배려로 서울에 올라가 관직생활을 하기도 했다.
양한묵은 중국, 일본을 두루 다니면서 민족의 활로를 탐색하던 중 동학교주 손병희를 만나 동학에 입교했다. 선생은 동학의 평등사상과 개벽사상에 경도되는 한편 사회개혁과 교육발전을 위해 보안회, 헌정연구회, 호남학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온 선각자였다.
해남군이 2030년까지 양한묵 선생의 전시관과 생가가 있는 옥천면 영신마을에 3‧1운동 역사마을을 조성한다는 소식이다. 향우로서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해남군에 감사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