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 토문재로 이순신 장군의 어란포가 백의종군으로 펼쳐있다. 시나브로 직장의 동기와 그의 아내가 바람에 지나간다. 연락이 끊겼던 동기의 소식을 그의 아내가 전해 왔다. 추억을 혼자 되새기곤 했던 터라 그 기별은 무척이나 반가웠다.
초임 발령지 역시 같은 곳이었다. 그런 연유로 친구가 된 우리는 서로의 고향 또한 바로 옆 동네임을 확인하고선 오랜 친구라도 되는 양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우람한 체격에 남자다움의 외모와 달리 그는 정(情)이 많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나이는 나보다 네 살이나 위였지만 어느새 십년지기 친구가 돼버린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인근으로 발령을 받았다. 한동안 새로운 발령지에서의 업무에 적응하느라 내 모습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던 나는, 매번 마음속으로만 오늘은 연락하리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차일피일을 미뤄왔다. 그러던 순간에 그의 연락을 받은 것이었다. 인사말을 마친 그의 아내는 잠시 침묵했다. “친구 어떻게 지내요? 건강하죠?” 침묵이 답답한 나머지 참을 수 없어 내가 먼저 물었다. “안양으로 이사 왔어요.” “우와!”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안양이라면 수원과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언제든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엉겁결에 큰 소리를 내질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 지금 병원에 있어요.” 그전까지 내 머릿속에 각인돼 있던 그녀는 언제나 다부지고 딱 떨어지는 말투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리만치 통화 내내 주저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혹시 사건 중에 다쳤나요?” “아녜요. 수술을 했어요.” “교통사고인가요?” “뇌종양이에요.” “네에?” 무심결에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야기를 정리해 보니 그가 안양으로 온 것은 단순히 발령 때문이 아니라 수술을 받기 위해 이사 온 것이었다.
“수술 경과는 어떻습니까?” “중태예요. 수술을 마치고 퇴원한 후에 발령통지서를 받고 부임지로 들어가다가 쓰러졌는데…” 끝내 말을 맺지 못한 그녀는 가늘게 흐느꼈다. 겨우 그가 입원해 있는 병원 이름만을 입 밖으로 내뱉은 뒤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사람의 죽음이란 정말 각양각색이라는 말을 이런 걸 두고 하는 이야기인가 싶었다. 삶이라는 것이 이렇게 간단히 끝날 수도 있는 건가. 나는 그가 죽음을 코앞에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문득 너무나 어이없게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서둘러 찾아간 그의 병실에서 나와 눈을 마주친 사람은 그의 부인뿐이었다. 머리에 붕대를 두르고 있는 그는 아직까지 정신이 들지 않았다고 하는데, 조용히 잠을 자고 있는 것 같았다. “의사 선생님이 퇴원하래요.” “이런 상태로요?” “병원에서 더 이상 손쓸 수 있는 게 없으니 집에서 임종을 맞으라는 거지요.” “아!” 그간 참았던 신음이 저절로 나왔다. 나에게는 가까운 친구를 잃는다는 슬픔보다도 제대로 뜻을 펴지도 못하고 이렇게 생을 마감하는 그의 삶이 너무나 서글프게 다가왔다. 때늦은 후회는 점점 더 깊어져 갔다.
그로부터 며칠 후, 새벽 무렵에 전화를 받았다. “그이가 죽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덤덤하게 느껴졌다. “고향으로 가는 택시 속에서 숨을 거뒀어요. 제 품에 안겨서요. 고향집에서 장례를 치를 거예요.” 그녀는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나는 망연히 천장만 바라봤다.
날이 밝자 고향으로 가는 차편에 올랐다. 그의 시신은 이미 입관이 됐다. 막 장지로 나가려는 참이었다. 나는 관을 한 번만 열어달라고 부탁했다. 마지막으로 그의 얼굴을 가슴 속 깊이 묻어두고 싶었다. 친구의 얼굴은 수척하긴 했어도 평온해 보였다. 준비해 간 성경책과 나의 시집을 놓은 후 관을 닫았다. ‘잘 가게, 이 친구야. 내가 자네를 좀 더 세심하게 지켜보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을. 용서하게나.’ 가슴 깊이 사과를 전한 후 고개를 치켜드니 세 살짜리 그의 딸아이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아이를 가슴에 품자 이 어린 것을 두고 먼 길을 떠나야만 하는 그의 아픔이 절절히 느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