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묵 목사의 삶은 특별하다. 5~6세 어린 나이에 큰아버지가 세운 가족교회에 다닌 일이나, 미국인 선교사들이 세운 광주제중병원(현재의 광주기독병원)에서 못 쓰게 된 오른쪽 다리를 고친 일도 예사롭지 않다. 특히 광주제중병원에서 만난 푸른 눈의 선교사들은 어머니가 준비해 간 치료비의 250배나 되는 거금을 부담해주는 은혜를 베풀어 7살 소년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광주제중병원을 소개해준 이도 도마련(都瑪蓮) 선교사였다.
그가 선교사들이 세운 광주 숭일학교와 전주의 신흥학교로 진학한 데에는 선교사들이 보여준 따뜻한 관심과 사랑이 일부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전주에서 학교를 마치고 광주로 내려 온 이준묵은 운명처럼 강순명 목사를 만난다. 이준묵은 사도 바울을 본받아 독신으로 일생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각오로 조직한 강순명 목사의 ‘독신전도단’에 들어가 6년 동안 신앙훈련과 농촌재건운동에 헌신한다. 청년 이준묵이 처음 부임한 교회는 전북 김제군의 임상교회였다. 4년 동안 이 교회를 섬긴 이준묵은 본격적인 신학공부를 위해 일본 고베신학교(관서성서신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일본에서 공부하는 3년 동안 그는 이른바 ‘구르마 전도’에 참여해 일본의 농촌마을을 누비고, 한국인 2세들을 위한 교회를 개척하기도 했다. 졸업할 무렵에 이준묵은 고베신학교 교장이었던 사와무라 고로(澤村五郞) 목사의 추천으로 중국 산뚱성(山東省)덕현(德縣)의 선교사로 파견된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이준묵 목사에게 결혼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결혼을 않겠다면 형제의 의리를 끊자’는 형 이문환의 강경한 태도에 바울의 길을 포기하지만, 그는 결혼식을 하고 4일째 되던 날 홀로 중국으로 떠난다.
산동성으로 간 이준묵은 1939년 5월부터 3년간 걸인들을 보살피고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문자를 가르쳤다. 중국에서 돌아온 뒤 광주양림교회 부목사로 재직하던 그에게 새로운 임지가 주어졌다. 그가 36년을 섬기게 될 해남읍교회였다. 때는 1945년 1월이었다. (● 35회 해남이야기 : 이준묵 목사와 등대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