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을 공부하노라면 누구나 만나게 되는 이름이 있다. 1984년부터 2004년까지 20년 동안 해남문화원을 이끌었던 분. 황도훈 선생이다. 선생은 문화원장이 되기 이전에 이미 월간지「해남」(1958),「해남공론」(1968),
「월간해남」(1968)을 창간한 선각자였다.
선생은 해남문화원장 시절에 많은 자료를 펴냈다.「마을 유래지」,「해남문헌집」,「국역해남지지류총람」,「해남군사」,「해남전래지명총람」,「전통윤리교본」,「고산문학과 해남」,「일본과 싸운 해남사람들의 이야기」,「양한묵 선생의 생애와 활동」,「대둔사지」,「해남의 서당」,「해남근현대 신문자료집성1,2」,「해남인물-조선왕조실록 관련기사」등 40여 종에 이른다.

 선생의 업적은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해남의 철기시대와 마한시대의 연구나 고대 지명분야에서도 숱한 성과를 이루었다. ‘고산문화제’, ‘고산문학대상’, ‘명량대첩기념대제’를 시작하고, ‘강강술래’와 ‘진법군고’도 되살렸다. 
해남문화원에서 풍물을 처음 배우고 자진모리 춤사위에 어깨춤이 절로 나던 순간을 잊지 못하는 학생들도 많다.
선생은 1927년에 해남읍 평동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조선대학교 문과를 나와 해남동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광주로 옮겨 조선대학교 부속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다가 다시 광주신문 문화부장, 남도일보 사회부장으로 활약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귀향한다. 

 그는 왜 해남으로 내려갔을까?「해남문화 제5집」에 실린 글에서 선생님의 형형한 눈빛을 본다.
“돈이 다하고, 名譽가 다하고, 權力이 다한 어느 날, 그 모든 것이 人生의 虛像이었음을 깨닫는 그날, 그날에도 우리를 사람으로 남게 하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자. 눈에 보이지도 않고 스스로는 아무런 힘이 없거니와 모든 사람을 사람답게 하고 내일엔 보다 아름다운 人生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 우리의 성의와 노력이 아직은 작다고 하더라도 빗방울이 바위 위에 떨어지는 그 모습을 눈여겨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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