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11월23일. 미국에 도착한 스님에게 하루 48시간의 강행군이 시작된다. 그는 대학원에서 일본문화사 강의를 듣고, 서산대사의「선가귀감」을 교재로 한국불교사를 가르쳤다.
참선법회와 펜실베이니아 원각사 법회도 이끌었다. 영어회화 고급반에도 참여해서 “더 이상 영어회화를 배울 필요가 없겠다”는 찬사를 받는다.
스님이 미국에서 로즈메리 교수를 만난 것은 기적이라 할 만하다. 여동생이 돼달라고 부탁하는 초면의 스님에게 “That's easy. I will do that.”이라고 화답했던 로즈메리 교수. 그날 이후로 20년이 넘도록 스님을 도와주는 그녀를 보면서 필자는 ‘인연’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스님에게는 방학도 배움의 시간이었다. 제자들과 함께 미국의 구석구석을 여행하면서 견문을 넓히고 사제 간의 정을 나눴다.
미국 유학의 꿈을 이룬 스님은 도전을 멈췄을까? 아니다. 2001년에 스님은 63세나 됐지만 호주 시드니대학교의 교환교수가 됐다. 스님은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호주의 대학생들과 교포들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전했다.
이듬해에는 뉴질랜드 웰링턴 빅토리아대학교 교환교수가 됐다. 2008년에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번에는 주 2회 오리건주 교도소의 수감자들을 상대로 “참 나를 찾아야 한다”는 법문을 전했다. 교수들에게는 반야심경을 강의했다.
스님은 바쁜 중에도 많은 책을 펴냈다. 시인 스님의 선시를 풀어서 「아시게나, 우리가 선 이 땅이 낙원이라네」를 펴내고「The Living Peace」라는 제목으로 미국인들에게 소개했다.「스님! 어떻게 영어를 그렇게 잘하십니까?」,「가시밭도 밟으면 길이 된다」둘은 스님의 자서전이다. 영어발음과 우리말 발음의 차이를 분석한「룰루랄라 영어발음」도 있다. 스님은 이 책을 광주교육대학교에서 3년 동안 가르쳤다.
만교일여(萬敎一如). 스님은 모든 종교가 전하는 진리는 하나라고 말한다. 스님이 쓴 자서전이지만 일반인들이 공감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스님은 이제 고향 해남읍 구교리의 작은 암자, 성불암에서 정진 중이시다. 스님의 백수(白壽)를 기원하며 우리 곁에 오래 머물러 계시기를 빈다.(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