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년(1592) 4월 14일, 왜군은 부산포에 상륙한다. 18일 만에 서울을, 6월1일에는 개성 에 이어 같은 달 15일에는 평양까지 2달 만에 파죽지세로 조선을 점령했다. 한편 선조 임금은 4월 30일 비가 내리는 새벽에 백여 명과 함께 서울을 떠나 명나라를 향해 피난길에 오른다. 6월 23일에는 불과 10여 명과 함께 초라한 모습으로 압록강가 의주에 이르렀다. 당시 왜장인 소서행장은 의주에 있는 선조에게 편지를 보내 “일본수군 10여 만이 또 서쪽 바다로 오는 중이니 대왕의 행차가 장차 어디로 가시려 하십니까?”라고 호기를 부렸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옥포해전(5월 7일) 이래 한 달 동안 7차례의 해전에서 연전연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황급히 풍신수길은 6월 28일 ‘조선수군을 먼저 격파하라’고 명령하자 이미 서울을 점령하고 있던 왜장들은 다시 남하하게 된다. 이때 먼저 도착한 왜장 협판(脇坂)은 조선수군을 대단치 않게 생각하고, 공을 혼자 독차지하려는 욕심에 자기 예하의 수군만으로 조선수군을 공격하니 이것이 바로 7월 8일 한산도 대첩의 발단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전라우수사인 이억기(1561∼1597) 장군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는 성웅 이순신(1540∼1598)의 빛에 가려 평가절하 된 듯하지만, 다음과 같이 명장 중의 명장이었다. 첫째, 만약 ‘이억기가 없었다면 온전한 이순신도 없었다.’ 1586년 이순신이 두만강 조산보 만호로 있을 때, 여진족을 막지 못한 죄를 받게 되었다. 이때 이웃 온성부 부사로 있던 이억기의 변호 덕에 백의종군으로 감형케 된다. 또 1597년 2월, 이순신은 선조의 명령에 불복한 죄로 잡혀가자 이항복 등에게 서신을 보내 무죄를 변론한다.
둘째, 혁혁한 그의 전공이다. 이순신 장군은 전라 우수사 이억기가 전선 25척을 이끌고 와 경상도 당포에서 합세하자 “여러 장수들이 모두 기뻐 뛰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했다. 이후 이순신과 연합해 대규모 해전에서도 연전연승하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한산도 대첩이다.
셋째,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였음이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확인된다. 이억기 장군은 1592년 1월 전라우수사로 부임해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하기까지 6년간이나 봉직하는데, 3도의 수사들 중에서 유일하게 한 번도 바뀌지 않은 명장이었다. 이는 전라우수사 330여 명의 평균 재임 기간이 1.5년 정도임을 감안하면, 최장기록에 해당한다. 뿐만 아니라 대인관계도 원만했다. 이순신과 원균은 서로 비난하였지만 둘 다 이억기에게는 우호적이었다. 게다가 십 여 차례 전공(戰功)에서 장계(임금에 올리는 보고문서)를 한 번도 독자적으로 올리지 않을 정도로 겸손했다. 그러나 장계로 이순신과 원균과는 결국 원수지간이 되었고, 이 불화는 결국 칠천량 패전의 단초가 되었다.
임진·정유란이 끝난 후 조정에서는 승전의 공을 논하는데, 선무공신 1등에는 이순신과 원균, 2등에는 이억기가 선정돼 3대 명장으로 평가된다. 아쉽게도 이억기 장군은 명량대첩이 있기 2달 전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한다. 따라서 명량대첩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전라우수영을 대표하는 명장 이억기 장군이 없었다면,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도 없었을 것임을 확신한다. 두 분을 함께 기념하는 명량대첩축제가 돼, 진정한 전라우수영의 축제로 거듭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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